오스카 와일드의 화려한 삶의 이면에 숨어 있던 작품
“자, 신들이 우리한테 가르치기를 거부하지 않은 쾌락을 함께 즐깁시다.”19세기 말 파리를 무대로 한 오스카 와일드의 숨겨진 이야기
“의심할 여지 없이 최근 몇 년간 발표된 영어권 소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잘 쓰인 에로틱 로맨스” _레너드 스미더스(1893년 《텔레니》를 출간한 영국 편집인)
저자 이름 없이 출간되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이 국내 최초로 소개된다. 와일드의 미학적, 도덕적, 성적 관심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텔레니》는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두 남성의 사랑을 생생하고 대담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남성 동성애자들의 사랑을 정면에 드러낸 영어권 최초의 게이 에로틱 소설로 손꼽힌다. 1893년 런던에서 ‘에로티카 비블리온 소사이어티’라는 시리즈로 200부 출간되었고 1934년에 프랑스에서도 300부 소량 한정판으로 발행되었는데, 프랑스판을 출간한 샤를 이르슈(Charles Hirsh)가 오스카 와일드가 다른 사람과 함께 와서 원고를 건넸다고 전하면서 이 작품의 저자가 와일드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와일드가 익명으로 책을 냈을 리 없다는 반대 주장과 공동 필진 여럿이 함께 집필한 것이라는 주장이 분분하지만, 특유의 아포리즘(“죄야말로 인생의 유일한 가치”)이나 예사롭지 않은 풍부한 인용(안티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성서, 그리스 신화, 셰익스피어, 초서, 단테, 밀턴, 셸리, 테니슨, 로런스 스턴 외) 등을 근거로 대체로 와일드 문학의 특질을 잘 갖춘 그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당대 최고의 유명 인사였던 오스카 와일드가 익명으로 위선적인 사회의 베일에 가려진 진면모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텔레니》는 단순히 소수자의 외침이나 흥미 위주의 자극적인 오락물을 넘어선,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라는 이름 자체의 영향력 또한 뛰어넘은 의미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신비로운 캐릭터와 빠른 전개, 파격적인 묘사로 가득한 이 문제작은 처음에는 한정된 곳에서 비밀스럽게 출판되어 한정된 독자에게 한정된 부수만 팔렸지만 20세기를 지나 21세기인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영화, 연극, 그래픽노블(2010년에 출간된 존 메이시의 《텔레니와 카미유》는 람다문학상을 받았다) 등으로 꾸준히 재생산되면서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사랑을 꿈꾸다
“분명히 말하지만, 저는 이 세상 어떤 여자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랬던 적도 없고, 저는 여자를 전혀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_본문 31쪽
프랑스의 젊은 사업가 카미유는 어느 날 자선 연주회에서 잘생긴 헝가리계 스물네 살 피아니스트 텔레니의 연주를 듣던 중 그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워한다. 텔레니의 연주는 “사람을 광기에 몰아넣어 죄악을 저지르게 하는 강력한 사랑”을 느끼고 싶게 만들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위해 나일강에 투신한 그리스인 노예 안티누스의 환영, 소돔과 고모라의 환영을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카미유에게 강렬한 성적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연주가 끝난 뒤에 대기실에서 만난 수수께끼 같은 피아니스트는 그를 유혹하며 알 듯 말 듯한 여운을 남기고 사라지는데, 그날 이후 카미유는 가라앉지 않는 열병을 안고 밤낮으로 텔레니의 주변을 맴돈다. 그러나 텔레니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카미유는 점점 더 속이 타들어만 간다. 카미유는 다른 여자를 사랑해보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순간에 텔레니를 마주치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깨닫고, 마침내 텔레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텔레니를 보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빨개졌습니다. 무릎에 힘이 빠지고, 가슴이 터질 듯 심장이 마구 쿵쾅대기 시작했습니다. 제 굳은 결심이 다 무너지는 것을 잠시 느끼다가, 이토록 나약한 자신을 증오하며 모자를 홱 낚아채 텔레니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미치광이처럼 뛰어나갔습니다. 제 이상한 행동에 대한 사과는 어머니의 몫으로 남겨두었습니다. (...) 제가 여전히 사랑하는 그 사람?네, 저 스스로를 속이려 하거나 문제를 얼버무리려 하는 것은 이제 소용없었습니다?에게 제가 한 행동을 얼마나 뼈아프게 후회하는지, 제 생각이 어떤지, 어머니는 알 리 없었죠. 네, 저는 텔레니를 더욱더 사랑했습니다. 착란에 빠질 만큼 사랑했습니다.” _본문 143∼144쪽
어려서부터 남자들에게 사랑을 느꼈지만 동성애를 ‘잘못’된 것이자 죄악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금기에 따라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왔던 카미유는 이 순간부터 본인의 성 정체성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텔레니와의 위험한 관계에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 그는 텔레니를 쫓아 뒷골목을 정처 없이 헤매다가 파트너를 찾아 떠돌던 동성애자들에게 유혹을 받는 등 은밀하게 이루어지던 그 당시 동성애 문화의 민낯을 낱낱이 경험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텔레니와 카미유, 두 사람의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사랑은 점점 무르익어가고, 한 걸음 한 걸음 극적인 결말을 향해 걷잡을 수 없이 치닫는다.
위선과 가식을 버리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자기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가장하는 것은, 자신을 기만하고 모두를 속이는 일입니다. 저는 제가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 체질이 잘못된 것이지, 제 자신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_본문 83쪽
《텔레니》는 카미유가 정체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어느 청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청자가 간혹 카미유에게 질문을 하고, 카미유는 거기에 대해 솔직하게 답변하며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카미유의 목소리를 통해 특수하거나 보편적인 ‘악’으로 규정하여 묵살해온 동성애는 침묵을 깨트리고 겉으로 드러나 공론화된다.
“저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인간이 지옥으로 만든 이 천국을 저주했습니다. 위선 위에서만 번성하는 편협한 우리 사회를 저주했습니다. 감각적 쾌락에 모조리 거부권을 행사하며 망치는 우리 종교를 저주했습니다.” _본문 159쪽
카미유는 극악한 죄인으로 낙인찍힌 동성애자들이 “안개 속 한밤의 산책”을 벌이는 실태, 귀족층 사이에 만연한 퇴폐적인 동성애 난교 문화를 까발리며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사회의 위선을 신랄하게 꼬집고, 또 한편으로는 텔레니를 만남으로써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사랑의 감정과 성적 결합을 자세히 묘사하며 텔레니와 마치 한 몸이 된 듯한 기쁨을 감격스럽게 전한다.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끔찍한 죄를 저지른 것처럼 진저리치던 카미유의 변화와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물음, “누가 제정신이고 누가 미쳤나요? 지금 이 세계에서 누가 고결하고 누가 저열한가요?”, “왜 우리는 천사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어야 하나요?”라는 외침이 오늘날에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책은 없다
《텔레니》에는 빅토리아 시대에 내재화된 동성애 혐오와 동성애자가 겪어야 했던 억압 속에서 비밀스럽게 형성된 게이 커뮤니티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익명으로, 소수의 독자를 위해 출판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솔직하고 과감하게 당시의 시대상을 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 소수자인 화자가 극도의 억압, 금지, 존재의 부정, 침묵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게 스스로 목소리를 내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텔레니》의 중요성은 결코 작지 않다. 강간, 여성 비하, 여성 신체에 대한 혐오, 사디즘, 매독, 자살, 귀족층의 남성 동성애 난교 심포지엄 등 지금 읽기에는 거슬릴 수 있는 표현이 눈에 띄나,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작품에 등장하는 ‘혐오’와 ‘비하’가 비단 빅토리아 시대만의 특성은 아닐 것이다. 책에 담긴 카미유의 외침이 오늘날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단순히 재미를 넘어서는 공감대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