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메갈리아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여성혐오의 한국사회, 가장 논쟁적 키워드 메갈리아 그들은 ‘여자 일베’인가? 그들의 ‘미러링 스피치’는 무엇이었는가? 반란적 발화로서 메갈리아의 실천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책은 언어분석철학이 페미니즘이라는 사유의 스펙트럼과 만났을 때 어떤 식으로 사회문화 현상에 대한 분석과 진단, 대안들을 구성해낼 수 있는가를 자유자재로 펼쳐내 보여준다. ‘어쩔 수 없다’고 많은 이가 무릎 꿇어버린 지점에서 다시 분연히 일어나 저항한 메갈리아의 역사를 기록하고 이를 해석하는 지식 공동체를 구성하도록 하는 도화선으로 이 책은 기능한다. 이제 페미니즘의 세기는 피해갈 수 없는 사유와 실천의 흐름임이, 이 책을 통해 한 번 더 증명되었다. ― 윤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 “메갈리아 이전엔 아무 문제 없었다”고? ―혐오발언의 침묵시키기 효과 혐오발언의 유형과 그 사회적 효과, 혐오발언의 대상자들이 겪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이미 다방면의 연구가 있다. 세상에는 인종, 성적 지향, 성별, 계급 등에 따른 다양한 혐오발언이 존재한다. ‘흑인은 투표할 수 없다’는 것, ‘유대인은 혐오스러운 민족’이라는 것, ‘여자는 멍청해서 남자한테 안 된다’는 것은 모두 혐오발언이다. 이러한 혐오발언은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권위 있는 집단으로부터 그렇지 못한 집단을 향해 행해지기 때문에, 혐오발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권위의 표지가 된다. 영미 언어분석철학자들이 지금까지 분석해온 혐오의 언어가 주로 유대인, 흑인, 성소수자, 여성 등을 향한 것이라 할 때, 한국의 혐오발언은 그 대상이 주로 여성에게로 편중된 것이 특징이다.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받는 제약, 가정에서 짊어지는 역할 기대, 온라인에서 마주쳐야 하는 혐오발언 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수자 혐오가 상대적으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이들로부터 그러지 못한 이들에게로 행해지는 상황에서, 문제 제기는 발화되지 못하거나, 발화되더라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레이 랭턴의 구분에 의하면 이러한 침묵은 (1)혐오발언 피해자가 겪게 되는 이러한 침묵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두려워하거나 보복을 두려워해 반론하지 못하는 “발화행위적 재갈”, (2)말대꾸를 행하지만 권위가 없기에 간단히 무시당하거나 권위 있는 자의 마음대로 의도를 곡해받게 되는 “발화효과행위적 좌절”, (3)아예 ‘대항발화’를 행할 수 있는 관습이 없기에 대항의 언어 행위 자체를 수행할 수 없는 “발화내행위적 불능” 등 여러 유형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여러 학자의 분석을 인용하며 이러한 ‘침묵시키기’가 혐오발언의 주목해야 할 효과임을 강조한다. 예컨대 몰래카메라라는 범죄를 비판하는 여성에 대해 “님은 몰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는 것, 여성혐오적 미디어 재현에 불편을 표했을 때 “피해의식 심하시네”라는 식의 대꾸는 혐오발언에 대한 대응을 좌절시키며, 이런 환경 속에서 혐오발언의 피해자는 ‘침묵당한다’. “인터넷의 여성혐오쯤 무시하면 되지, 똑같이 대응할 필요 있느냐”고? ―혐오발언의 선동 효과 혐오발언은 피해자를 침묵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러 연구자가 혐오발언의 중요한 효과로 ‘선동’을 꼽는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여러 신문 기사는 유대인을 각종 범죄자로 묘사하고 있다. 유대인의 특징을 지닌 남자가 아이들을 꾀어내는 어떤 허구의 이야기는 세계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하며 전제한다. ‘유대인은 아이들을 납치한다’라는 사실 주장 명제, ‘유대인을 혐오하는 것은 올바르다’는 규범 명제, ‘훌륭한 독일인이라면 유대인을 혐오한다’는 사실 및 규범 명제 등이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전달된다면, 메시지를 전달받은 이가 유대인에 대해 갖는 인식은 변화한다. 혐오의 언어는 힘이 세다. ‘유대인은 전부 사기꾼이다’, ‘흑인은 어리석다’ 같은 혐오발언은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그것을 몰상식하고 근거 없다 여긴다 해도,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발화되는 것만으로 어떤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여러 연구를 통해 증명된 사실이다. 이렇듯 혐오발언은 청자의 인식 세계에 어떤 전제를 심어주고, 이것을 사실로 만들어 혐오를 선동하고 재생산하게끔 한다. ‘김치녀’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에게 기생하는 사치스럽고 이기적인 김치녀’를 향한 혐오발언은 ‘김치녀라는 이기적인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주장 명제를 확산하여 ‘김치녀를 혐오하는 것은 올바르다’는 혐오를 선동한다. 김치녀를 향한 욕설은 폭넓게 반복 재생산되는 것만으로 여성의 소비를 사치로, 그것을 죄악으로 기정사실화하도록 선동하고 혐오를 정당화하는 셈이다. 그리고 혐오발언이 갖는 이와 같은 선동성은 청자의 인식뿐 아니라 욕망까지 변화시킨다.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좋은 여성’(현모양처, 개념녀)과 ‘나쁜 여성’(김치녀, 된장녀) 이미지의 이분법적인 재현 방식과 선동으로 인해 여성은 여성 집단 내에 ‘여자 망신 다 시키는’ 이기적인 여성(김치녀)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고, 스스로 그렇지 않은 여성(개념녀)이 되기를 욕망하게 된다. 피해자 집단이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혐오의 언어가 선동하는 인식에 맞추어 스스로의 인식과 욕망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김치녀와 된장녀를 향한 혐오에 동조하게 되는 것이다(‘코르셋을 입는다’고도 한다). 이미 숱하게 존재하는 여성혐오적 편견과 혐오발언들을 ‘그냥 무시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때문에 전혀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존재하는 혐오’에 대한 이런 적극적 방관은 혐오발언에 “파생된 권위”를 실어줌으로써 혐오에 가담한다. 혐오발언은 사회적으로 더 적은 권위를 가진 집단에 행해져, 그들을 향한 부정적 사실을 선동하고 혐오를 착실하게 확산시키도록 작용하기 때문이다. 혐오발언은 잘못된 인식을 선동하면서 청자의 대응을 침묵시키며, 이에 대한 ‘무대응’은 여기에 힘을 실어준다. 그렇다면 혐오발언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여기서 주디스 버틀러의 ‘반란적인 발화’ 개념이 등장한다. 메갈리아의 “반란적인 발화” ―혐오발언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 여성혐오와 침묵의 악순환 속에서 메갈리아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들은 어떻게 침묵을 깨고 되받아쳐 말할 수 있게 된 걸까? 혐오발언이 여성을 침묵시키고 열등한 지위로 못 박아두는 효과에 주목한 레이 랭턴과 달리,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발언 자체에 ‘저항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혐오발언에 의해 호명되는 이들은 이에 대응해 ‘반란적인 발화’를 할 가능성을 손에 넣는다. 혐오발화자들은 혐오발언의 피해자들에 비해 사회·관습적 권위를 가지고 말을 하지만, 관습이 보증하는 권위는 특정 주체에게 필연적으로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혐오발언이 발화되는 순간 그에 대한 대항발화를 통해 기존의 권위를 교란할 수 있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이때 이러한 반란적 언어 행위는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고 기존 권력 관계를 재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1955년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나중에 버스에 탄 백인에게 좌석을 양보하라는 백인 운전기사의 명령에 대항했다. “나는 내가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종 분리정책이 행해지던 당시 몽고메리 지역에서 로자 파크스의 ‘거부’는 허용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파크스는 “권위를 부여받지 않고서 권위를 가지고 말하기”를 행했고, 이 순간 기존에 백인에게 존재하는 듯 보였던 권위에 균열이 발생했다. 파크스의 발언은 이후 버스 보이콧 운동으로 이어졌고 파크스는 인종 분리정책에 저항하는 국제적 아이콘이 되었다. 기존에 여성은 “여자는 스물다섯 넘으면 꺾인다”, “여자는 3일에 한 번 패야 한다”는 혐오발언의 대상이었다. 역으로 이 관습 체계에서 “남자는 3일에 한 번 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