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Description
문학동네시인선 097 권대웅 시집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가 출간되었습니다.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이후 근 30년 동안 시인은 단 두 권의 시집을 펴낸 바 있었지요. 첫 시집『당나귀의 꿈』이 1993년에, 두번째 시집『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가 2003년에 출간되었으니 각각 10년의 터울이다가 이번 세번째 시집에서는 그 연년을 좀더 늘렸다지요. 14년 만이라지요. “14년 만에 내는 시집인데 140년처럼 먼 것 같다”라고 시인이 자서에서 쓴 것처럼 그 세월이 참 아득하게도 읽힌다지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여름의 눈사람들.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들.”, 이 문장을 힌트로 삼자니 제목이 아주 잘 보인다지요. 그러니까 왜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라고 했는지 듣는 순간 시집 속 시 전편이 한 궤에 꿰뚫어진다지요. 나도, 그 누구도 다 사는 계절 여름, 그리고 가는 계절 여름. 그 여름의 끝자락에 이 시집을 붙잡으니 ‘조금 쓸쓸했던’ 누군가의 ‘생의 한때’를 더듬고 또 짐작도 해보게 됩니다. 그 누군가는 나 아니면 당신, 우리 모두를 향해 떠는 나침반의 바늘이기에 흔들리는 그 끝을 유심히도 아니 볼 수가 없겠다지요. 권대웅 시인의 이번 시집이 그래서 뭘 말하고 있는 건데? 하고 물으면 예컨대 이 구절부터 튀어나갑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내가 살다 간 방”이요.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와 대구가 되는 듯한 이 말이요. 그렇다면 바로들 이해가 되실까요. 한때 한 교집합 속에 묶여 있던 당신과 나, 서로를 등지고 그 밖으로 걸어 나올 수밖에 없었으나 세월이 한참 흐르고 멀찍이서 다시 보니 커다란 합집합 속에 섞여 있음으로 공존함을 인정하게 된 당신과 나. 단순히 ‘사랑’만을 주제로 하는 시집이 아님을 아시겠지요. ‘삶’이라는 큰 틀 속에 우리들 존재의 ‘있고 없음’을 주제로 하는 시집임을 아시겠지요. 그 말로 다하기 불가할 만큼 커다란 사유들을 사소하고 평범하며 작디작은 이야기로 꽃씨 뿌리듯 흘려둔 시집임을 아시겠지요. 그래서일까요. 시인의 배려 속 4부로 나뉘어 담긴 총 62편의 시는 어느 하나 막히는 대목 없이 잘도 읽힙니다. 오히려 너무 술술 읽혀서 시 한 편을 읽어내는 그 속도를 제어하느라 몇 번이고 호흡을 다시 다지거나 책장 끄트머리를 접었다 펴는 일을 행하게 됩니다. 묘한 것은 그런 쾌속이 다음 시로 넘어갈라치면 의뭉스럽게도 일단 시동을 끄고 본다는 사실입니다. 한 편의 시 안에서 전속력으로 미친 질주를 행했는데 다음 시로 넘어가려니 천길만길 낭떠러지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요. 참 쉽게 읽히는데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더뎌지는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새긴다는 건 그런 거겠지요. 나도 모르게 느려지는 손놀림 같은 거, 발바닥에 본드를 바른 것도 아닌데 쉽사리 잘 안 떼어지는 두 발 같은 거. 시인은 연신 묻습니다. "그때 내가 살았던 것일까 지금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러게요. 우린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걸까요. 저는 이 시의 읽힘 또한 인생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남녀의 ‘만남과 이별’이라 할 우리의 ‘생과 사’란 것이 이렇게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이구나, 시의 해석 이전에 시의 읽음 그 자체만으로도 경험할 수 있겠구나, 다시금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하여 이 시집은 소리를 크게 내어 읽어보십사 강권하기도 하는 바입니다. 쓸쓸한 아름다움이 어떤 뉘앙스인지 읽는 즉시 온몸으로 증명해보일 수 있기도 하거든요. 더불어 특징이랄까요, 이 시집에 유독 많은 것이 ‘물음’입니다. ‘울음’의 대목일 것 같은데 ‘물음’이 주저앉은 자리 꽤나 많습니다. 어쩌면 이 시집은 ‘물음’의 시로 지어진 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포복(匍匐)」은 시 전체가 물음의 행으로 이루어진바, “시냇물은 내 신발을 신고 얼마나 멀리 갔을까”(「뭉게구름」), “세상에 봄은 얼마나 왔다 갔을까”(「2월의 방」), “미움에도 연민이 있는 것일까”(「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등등 시 곳곳에서 물음의 대목만 밑줄쳐본다 해도 셀 수 없을 텐데요, 저는 이 ‘물음’의 힘에 주목을 해봤습니다. 우리가 물음을 던지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라지요. 몰라서 물을 때와 알면서도 물을 때. 어쩌면 이 시집은 후자의 경우만 같습니다. 뭔가 생 전체를 뜨겁게 살아낸 자가, 세상을 좀 알겠는데 싶은 자가, 그럼에도 입을 꾹 다문 채 낮에는 하염없이 하늘 속 구름이나 쫓고 밤에는 검은 하늘 속 달을 올려다보는 일로 그 물음을 던지고 그 물음의 답도 거기에서 찾는 듯한 풍경을 우리는 구경하는 데서 배움과 감동을 동시에 얻는 듯합니다. 이 시집은 아무리 훑어봐도 어떤 강요도 앙탈도 분노도 욕망도, 하여간에 없는 게 참 많습니다. 저라면 시뻘건 피로 물들였을 이야기를 오히려 맑은 물로 씻어내고 있는 듯한 흐름, 그 흘려보냄만 있습니다. 굳이 ‘여름’이라 콕 집어서 한 계절을 붙들어 앉혔지만 이 자리에 봄이 와도 가을이 와도 겨울이 와도 무방할 것이란 걸 쓰는 시인이나 읽는 우리나 모르지 않을 것을 압니다. 세상 그 누구도 영원히 존재할 이는 없으니까요. 있다 없고 살다 갈 뿐일 테니까요. “사랑도 너무 추우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라는 구절이 시집을 덮고 난 뒤에도 계속 입에서 맴돕니다. 같은 시 안에서의 이런 몇 구절이 동시에 내 안에서 번집니다. 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 불렀다 그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정처 없이라 불렀다 떠나가고 돌아오며 존재하는 것들을 다시 이름 붙이고 싶을 때가 있다 홀연 흰 목련이 피고 화들짝 개나리들이 핀다 이 세상이 너무 오래되었나보다 당신이 기억나려다가 사라진다 (……) 내가 이 세상에 왔음을 와락이라고 불렀다 (……) 이생은 찰나라고 부르는가 먼 구름 아래 서성이는 빗방울처럼 지금 나는 어느 과거의 길거리를 떠돌며 또다시 바뀐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에서 머잖아 우리는 “씨풀씨풀” 내리는 눈을 맞을 것입니다. 시집 속에서 삶의 의미 같은 걸 때론 발견하게도 하거니와 권대웅 시인의 말 가운데 이런 대목에서 무릎을 쳐보기도 합니다. “인생이라는 게 다 길바닥이야”(「눈」)란 진리를 거창한 말씀이 아니라 망치 같은 연설이 아니라 어떠한 읊조림으로 물음을 던지고 답을 받기도 하는 시집. “출근하는데 죽은 매미가 마당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화무십일홍」)처럼 문득 둘러보았을 때 무엇이 보이시는지. 그 보임을 묻고 또 묻는 일로부터 이 시집은 시작되고 마무리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