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한 사람의 생애를 요약하면 장소들이 남는다.
잘 자라다 가요”
살아낸 자리마다 담담히 쌓인 관계의 역사
그 켜를 쓸어내리는 손에 움켜지는 우리의 부드러운 유래
섬세한 온기로 친밀함의 지도를 펼쳐내는 시인
봉주연의 두번째 시집
2023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봉주연의 두번째 시집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622번으로 출간되었다. 첫번째 시집 『두 개의 편지를 한 사람에게』(현대문학, 2024)를 통해 무한한 마음을 띄워 보낸 시인은, 생의 질감과 세부를 촘촘하게 포착해낸 시 52편을 총 4부로 나눠 묶은 이번 시집을 통해 그 마음이 닿고자 했던 곳곳의 주소들을 열어 보인다.
그렇게 나갔다가는 추울 거야.
아침저녁으로 후회하기 위해 봄날이 있는 것 같아.
늦은 저녁 놀이터에서 나란히 그네를 탔다. 뭐 이런 데서 놀아, 핀잔을 주면서도 누가 더 높이 올라가나 시합을 벌였다.
식탁 아래에 들어가 있는 걸 좋아해. 호텔 로비에 있는 그랜드피아노 아래에 들어가기도 했다. 벙커 침대를 갖고 싶어. 어디서 그런 말을 알아 온 건지. 나는 갖고 싶은 것을 분명히 말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하는 사람을 보면 스스럽게 느껴져.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 천에서, 유연함 속에서.
―「주소력(住所歷)」 부분
모든 장소는 이야기를 가진다. 어디에도 발 딛지 않은 채 허공에 붕 떠 있을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여러 장소를 거치며 살아가고, 머무는 장소마다 그곳에서 먹고 자고 웃고 떠든 자취가 남는다. 수많은 장소로 구성되는 이 “세상이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손다운 손」)음을 이해하는 시인은 장소들의 좌표를 위치가 아닌 내력으로 표시하고, 그 좌표들로 씌어진 시는 단순히 주소를 모아 적은[錄] ‘주소록’이 아니라 그곳에서 지내며 겪은[歷] 시간까지 내포하는 ‘주소력’에 가깝다. “주변도 장소의 범주에 포함”(「This video is playing in picture in picture」)시킴으로써 도로명이나 지번이 아닌 개개인의 역사로 주소를 읽어낼 때, 봉주연의 장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지라도 진실일 순 있다”(「식물 식별 의지」).
그의 시 세계에서 “친밀함은 지도가”(「독도법」) 되므로, 봉주연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유래로 “태어난 곳”이나 “자라온 곳” “부모님이 계신 곳” 대신 “천”[「주소력(住所歷)」]을 지목한다. 천에는 “부재(不在)”의 “형태를 지탱”(「내밀의 빛」)할 수 있는 힘이 있기에 ‘커튼’은 “내가 잠들기 전에 하는 버릇”과 “잠이 들 때 짓는 표정을 알고”(「연대」) ‘천막’은 “인형의 얼굴”이 아닌 “뒷목에 담겨 있”는 “고백”(「덜미」)을 본다. 시인은 이토록 내밀하게 우리를 감싸안는 천으로 지은 “이불에 누워 사진을 넘겨”(「내일은 말고 어둠만 오라」) 보듯 지난날의 공간들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부드럽고 연한 이불 위로 펼쳐진 “여러 장의 사진을 겹쳐놓”았을 때 “선명하게 보”(「프로토콜」)이는 것은 우리의 장소들이 그동안 “전부 지켜”봐온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윤곽」)일 것이다.
“어떤 장소는 사람과 같아서 떠나야 할 때를 인정해야 해”
더는 ‘나’가 아닌 무수한 ‘나’를 사랑하기 위하여
새집을 향해 선선히 걸음을 옮기는 오늘의 성장한 ‘나’
조그만 사람에게선 갖은 애를 쓴 냄새가 난다.
초등학교와 유치원, 작은 보습 학원이 줄지어 있다. 하교 시간에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이 지나가면 햇볕 냄새가 났다.
타향이 고향이 되는 거야. 어지럽게 짐이 펼쳐진 거실 마루에 앉았다. 반나절 만에 다른 곳으로 왔구나. 달라지기보다 달라지기를 결심하는 시간이 길고. 본가가 어디냐고 물으면 태어난 곳을 말해야 할지, 자라온 곳을 말해야 할지, 부모님이 계신 곳을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요약하면 장소들이 남는다.
잘 자라다 가요.
―「주소력(住所歷)」 부분
장소마다 아이가 있습니다. [……] 기억 속에 없는 장소에서도 아이는 자라났을 것입니다. 비지땀을 흘리며, 갖은 애를 쓰며. 제가 경험해본 타자는 이 아이들이 전부입니다. 한때 나였으나 더 이상 내가 아닌, 작은 사람.
―2023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당선 소감에서
이번 시집의 제목을 품고 있는 데뷔작 「주소력(住所歷)」을 비롯한 그의 시편들을 두루 살펴보면 “봉주연의 시적 주체에게 존재의 ‘자리옮김(deplacement)’, 즉 이사(移徙)는 필연한 운명”(하혁진, 해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임을 알 수 있다. 다양한 관계와 기억이 쌓인 터전을 떠나는 일은 힘들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늘 지금 서 있는 “이곳은 나를 밀어내지 않았으면”(「물고기는 알아서 한다」) 하지만, “한곳에서 시작된 불씨는 그 장소에서 끝이 나야”(「일조권 사선제한」) 하므로 기꺼이 미련의 불을 꺼뜨리고 길을 나서야 한다. 그 어떤 머묾도 결국 긴 여정의 일부일 뿐, 영원한 잔류란 불가하다.
“집을 옮기면 새로운 버릇을 만들어야”(「적응」) 하므로 이동은 반드시 적응을 요하고, 적응은 곧 성장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봉주연의 시 속 인물들은 떠나온 장소마다 남아 있는 ‘나’가 아닌 ‘나’들을, 새로운 도착지에 알맞도록 몸과 호흡을 바꿔온 아이들을, “달라지기를 결심하”고자 “갖은 애를 쓴” “조그만 사람”들을 특별히 기특하게 여기지도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보지도 않는다. ‘성장력(成長歷)’이 된 자신의 주소력을 더듬어 내려가며 “잘 자라다 가요”[「주소력(住所歷)」]라는, 차분한 온도의 말 한마디를 건넬 뿐이다.
그들이 과거를 향해 고하는 작별이 단호하고도 다정한 까닭은, 헤어짐의 필연성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태도가 포기나 체념과는 거리를 두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 인물들은 “방을 떠난 이후에 방을 실감”(「공원 설계 도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아쉬워하면서도 머물던 곳을 떠나고, “허물기에 크다면 유지하기에도 너무 크다”(「적응」)는 것을 알기에 버거워하면서도 추억이 깃든 장소를 허문다. “내일 현관문을 열었을 때도 오늘과 같이/이 집을 사랑하기 위하여”[장소력(場所歷)], 봉주연의 시적 주체들은 언제라도 “사랑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손다운 손」)으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계단이 있다는 것만으로 이곳은 사람을 불러 모으게 될 거야”
나날의 풍경이 다르리라는 믿음으로 오르내리는 계단
그 끝에 둥그런 식탁의 훈기가 기다리고 있기를
[……] 나선계단을 오르면 어느 날에는 레코드 가게가 되었다가 어느 날엔 거실이 되고, 어느 날엔 헌책방이 됩니다. 사고 싶은 책을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꽂아 넣고 다음 날 다시 찾으러 오는 마음. 그러고도 사지 못하고 다시 더 깊은 구석에 꽂아 넣는 것. 그림자는 내 옆으로도, 앞으로도 생겨날 수 있는데 항상 뒤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곡해하며 자라났습니다.
―「계단참」 부분
건물이나 비탈에 붙박인 설비로서의 부동성과 보행자의 움직임을 위한 층층대로서의 이동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 봉주연의 시 전반에 자주 등장하는 ‘계단’이 곧잘 ‘현재’에 유비되는 것은 이러한 특징과 무관하지 않다. 출발을 위해 발을 뗀 곳과 걸음을 마치고 이를 곳 사이에 자리한다는 점에서 계단은 현재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불안정하게 놓여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시인이 계단의 비유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따로 있다. 우리는 현재를 한 계단 한 계단 꼭꼭 눌러 밟듯 살아내야 한다는 것. 즉 지금 여기의 “삶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우리가 가까이 산다면 수박을 반 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