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삶의 흐름 속에서만 말은 그 의미를 지닌다. <비트겐슈타인>
이 책은 특별한 저술이다. 한 사람도 파악하기 어려운데 두 거장(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을 서로 비교하고 분석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또 공저자와 공역자 중 한 사람(이승종, 연대철학과 교수)이 저자이면서 동시에 역자라는 사실도 특이하다.
이 책은 먼저 Derrida and Wittgenstein, Temple University Press (1994)로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1998년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제목으로 민음사에서 번역 출간한 것을 10여 년이 지난 뒤에 <수정증보판>으로 재출간하였다. 전작에 대한 수정과 더불어 국내외 철학학술지 등에 실린 서평을 게재하고 그에 대해 공저자들이 각각 답론을 정리하여 수록하였다. 이 일은 철학에 관한 대단히 의미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승종은 비트겐슈타인 전공자로서 유학 시절 자신의 지도 교수인 뉴턴 가버와 함께 이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의 저술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은 단순히 지도 교수를 보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뉴턴 가버와 대등하게 공동으로 작업하는 수준이었음을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의 판권은 뉴턴 가버가 한국의 판권은 이승종 자신이 갖게 되었고 다른 나라의 판권은 서로 공유하게 되었다.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을 서로 비교하고 그 유사점을 추출하여 자신의 철학 체계 속에 유입시키려는 시도는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철학과 자연의 거울”로 유명한 리처드 로티와 그 외 여러 사상가들이 그 둘의 비교를 시도하였다. 그렇다면 이 둘의 유사점은 무엇일까. 이 둘이 유사하다면 미국 철학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에 비해 데리다는 왜 그렇게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말인가.
비트겐슈타인은 미국의 언어분석철학의 시조이며, 그와 데리다를 비교한다는 것은 데리다를 어떤 식으로든 해석해내겠다는 그들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결론은 비트겐슈타인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많더라도 우리는 이때까지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데리다 읽기를 기존의 철학적 전통 속에서 헤아려볼 수 있다.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의 큰 공통점은 이전의 철학 사상들의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 둘은 전통 철학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형식적 논증, 논리적 분석, 범주적 의미론보다는 비사실적 담론, 표현적인 언어, 은유에 우선성을 둔다. 기존 철학에는 은유가 개입될 여지가 없으며, 은유는 단지 시나 소설을 구성하는 문학적 기법일 뿐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견해에 반대한다. 논리적 분석, 과학주의에 대한 반발, 우리가 외부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에 우선권을 두고 매달리는 태도에 대한 거부는 두 사람 모두에게 본질적이고 중요하다. 그 둘의 차이점 또한 확연하다. 새로운 철학을 구성하고자 하는 비트겐슈타인과 기존 철학의 해체를 도모하는 반항아 데리다의 비교는 일종의 긴장감마저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현대 언어철학의 흐름 전체 속에서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이 공통으로 형성하고 있는 전선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김상환) 이 책에는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프레게와 러셀 이후 언어의 문제에 천착한 주요 영미철학자와 유럽의 언어철학을 개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서양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언어관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커다란 미덕은 언어철학의 현재적 상황과 주요 쟁점을 균형 잡힌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김상환)
뉴턴 가버는 비트겐슈타인 편에 있고, 이승종은 데리다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다. 이 책은 그 둘이 장을 분담하여 서술하지 않고 공동으로 저술한 만큼 그 두 입장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책은 미국의 기존의 철학자들에게 데리다를 소개하기 좋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우리나라에서도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떠도는 담론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사상으로 데리다를 바라보고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과 의미를 파악해야할 때이다.
이 책의 주제는
이 책의 주제는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의미와 언어를 둘러싼 철학적 문제를 살피는 과정에서 비사실적 담론, 표현적인 언어, 은유 등에 우선성을 둔다는 점에서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은 일치한다. 비사실적 담론, 표현적 언어, 은유 등은 형식적 논증, 논리적 분석, 범주적 의미론 등에 대조되며, 마찬가지로 <형식>이나 <관념> 혹은 다른 현상학적으로 주어진 것들과도 대조된다.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은 모두 은유를 거짓된 지식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것에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은유에 대한 전통적인 태도가 철학에서 인식론의 헤게모니를 영속시키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시대가 데카르트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기도 하다.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의 글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이들이 데카르트적 전통에 대해 현저한 반대 입장에 서 있음을 알게 된다. 과학주의에 대한 거부,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 알 수 있다는 사실에 최우선권을 두는 태도에 대한 거부는 모두 이 두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면서도 본질적인 것이다. 이러한 거부는 철학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 같은 주제들에 관해 종종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위의 커다란 주제에 관해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이 상호 보완적이라는 점을 서문에서 미리 말해 두고 싶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일치와 보완의 관계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서로 전적으로 다른 것이기도 하다. 비트겐슈타인이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면 데리다는 텍스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데리다가 텍스트를 검토하면서 새롭기도 하면서 때로는 애매한 용어, 길고 복잡한 문장, 말장난에 빠뜨리는 다의미multiple meanings를 사용하는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문제를 검토하면서 일상의 경험에서 끌어낸 유추와 직유를 사용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항상 친숙한 용어와 짧고 명확한 문장을 사용한다. 그 둘 중 어느 누구도 전통적인 철학자들처럼 글을 쓰지는 않는다. 루소와 후설에 관한 데리다의 설명이 중요한 의미에서 일면적이기는 하지만, 텍스트에 관한 그의 검토는 언제나 자극적이고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그는 훌륭한 비평가이다.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명료함과 개방성, 문제에 대한 관심과 그의 작업이 지닌 자기 비판적 성격에 의해 비평가로서보다는 훌륭한 철학자로서 부각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을 철학을 종료시킨 사람이라고 해석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그는 전 생애를 철학의 쇄신에 바쳤다.
_뉴턴 가버 <서문> 중에서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어떤 서평자들은 그 제목 때문에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 중 누가 이 책에서 승자로 선언되는지에 대한 모종의 판단을 찾고자 했다. 어떤 서평자들은 우리가 비트겐슈타인을 승자로 선언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개탄했고, 어떤 서평자들은 이에 환호했다. 물론 그러한 의미의 <승자>는 있을 수 없다. 철학사와 문학사에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두 사상가에 대해 어떤 최종적 판단을 내리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시도이며 그것이 우리의 의도였던 것도 아니다.
문학사의 관점에서는 데리다의 작품이 분명 더 흥미롭다. 그의 문체가 그 이유의 하나이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동안 무시되어온 텍스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그의 업적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문학보다는 철학이며, 철학사의 관점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무게감이 더하다. 하지만 그의 영향이 어떻게 자리매김할지를 예단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왜냐하면 그의 입장이 극단적으로 과격한 것이어서 철학의 영역에서 굳건하게 자리잡은 실행들과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 러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급 논리학자로 출발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처녀작 <논고>는 프레게와 러셀의 새로운 기호논리학을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논리적 분석에 의한 사유의 명료화를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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