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기와 역사

조르조 아감벤
2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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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문제적 사상가 아감벤의 데뷔작. 벤야민과 마르크스 그리고 하이데거를 통해 ‘언어’, ‘구조’, ‘혁명’, ‘변증법’을 근본적으로 재사유한 책. 지금까지 벤야민은 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의해 그리고 하이데거는 나치즘/프랑스 탈구조주의에 의해 정치적으로 또는 탈정치적으로 이해/이용되어 왔으나 이 책에서 아감벤은 벤야민과 하이데거를 대뜸 마르크스 옆에 놓는다. 그리고 벤야민, 하이데거, 마르크스, 헤겔, 아도르노 등에 대한 재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난 1980년대 이후 우리의 지성계에 여백과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아도르노와 벤야민에서의 방법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4장 ‘왕자와 개구리’를 변증법과 총체성 그리고 매개 등이 개념과 관련해 그리고 이에 기반해 우리 문학계의 이론의 한 축을 장악하고 있는 리얼리즘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촉구하는 논쟁적인 글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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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What's up 총서를 발행하며 언어 실험 유아기와 역사 장난감 나라 시간과 역사 왕자와 개구리 우화와 역사 잡지를 위한 프로그램 주 옮긴이 후기

Description

21세기의 문제적 사상가 아감벤, 벤야민과 마르크스 그리고 하이데거를 통해 ‘언어’, ‘구조’, ‘혁명’, ‘변증법’을 근본적으로 재사유하다. 20세기는 결코 혁명에 걸 맞는 역사 개념과 정치 개념, 시간 개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 진정한 역사 유물론자는 무한한 선형적 시간 속에서의 연속적인 진보하는 허약한 가상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고향을 향유하는 사실을 매순간 회상하면서 언제든 시간을 정지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이다.” “우리의 영원한 보호막으로서 지켜져야 할 유아기마저 놀이, 우화와 더불어 관심사에서 멀어지고 있는 시대에 ……[미니어처들은] 우리 낡고, 헤진 역사의 마지막과도 같은 시민들에게 바로 우리를 위해 간직되어 있던 어떤 메시지를 더듬거리며 전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직관은 여타의 역사기술보다 뛰어나다”(하이데거, 『휴머니즘에 대한 편지』). ‘호모 사케르’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을 국제적 사상가로 데뷔시킨 지적 호적 기록부! 아마 9?11 테러 이후 지구촌 전체의 철학계를 사로잡은 개념이 하나 있다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그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타나모 수용소에 불법/비법적으로 수감된 테러 용의자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소개되기 시작해 오늘날의 인간 일반의 정치적 존재론을 형상화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모호한 라틴어는 매력적인 만큼이나 상당히 애매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것은 동시에 이 개념에 대한 이 정치 철학자의 탐색이 여전히 진행 중인 데서도 상당 부분 유래한다. 따라서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이 국내 지식계에 소개된 지 제법 시간이 흘렀으나 아감벤과 ‘호모 사케르’는 한편으로는 풍문과 소문의 대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단언과 확신의 대상으로 나뉘어져 가고 있는 듯 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간되는 이 책은 아감벤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일종의 아감벤의 지적 출생 기록부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이와 관련해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아감벤이 1980년대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여진을 일으키고 있는 ‘벤야민 르네상스’의 주도자였으며, 이 책이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지성계는 마르크스주의의 유행과 미국발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에만 눈이 멀어 있었지만 실제로 지난 1990년대 이후 서구 지성계의 가장 중요한 지적 발견은 아감벤에 의한 벤야민 그리고 하이데거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지금까지 벤야민은 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의해 그리고 하이데거는 나치즘/프랑스 탈구조주의에 의해 정치적으로 또는 탈정치적으로 이해/이용되어 왔으나 이 책에서 아감벤은 벤야민과 아감벤과 하이데거를 그러한 맥락에서 탈구축시켜 벤야민과 하이데거를 대뜸 마르크스 옆에 놓는다! 얼핏 대단한 지적 도발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아감벤이 벤야민의 이탈리아어판 전집 편집자였으며 하이데거를 바로 곁에서 사숙(私塾)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단순한 ‘도발’을 넘어선 무게를 갖는다. 벤야민은 한 편지에서 “역사를 고찰하는 우리[벤야민과 하이데거]의 대단히 다른 두 가지 방식이 상호 충동하면서 생겨날 섬광을 고대”하고 있는데, 바로 이 책에서 그러한 섬광이 일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역사주의와 아도르노 식(루카치) 식의 변증법적 매개와 총체성이 일거에 거부되고 있다. 심지어 그는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직관은 여타의 역사기술보다 뛰어나다”는 하이데거의 입장에 동의하기도 한다. 마르크스와 하이데거가 동일한 시간 개념과 역사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만한 지적 도발을 함부로 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문제작인 까닭이다. 20세기는 정치 혁명에 걸 맞는 역사 개념과 시간 개념, 다시 말해 인간에 대한 혁명적 사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처럼 이 책은 역사, 변증법 등과 관련된 아감벤의 지적 혁명의 산실이자 인큐베이터였다. 그리고 그의 지적 성장의 인큐베이터답게 이 책은 ‘유아기’와 ‘역사’라는 두 가지 개념을 집중적인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우선 ‘유아기’는 ‘언어와 역사’를 갖지 못하는 만큼 20세기의 (언어학) 혁명 그리고 역사(주의)를 근본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근본적인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른은 아이의 아버지가 아닌가. 하지만 ‘언어’ 하면 우리는 당장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언어학 혁명이 구조주의로 이어진 것을 떠올리는데, 이 구조주의는 ‘역사’를 일단 인식의 패러다임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시에 이 언어학주의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신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아감벤은 20세기의 구미와 유럽의 지성계를 양분해온 이러한 구조주의와 논리실증주의의 두 가지 흐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복시킨다. 무엇보다 아감벤이 보기에 인간의 존재가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것은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이것은 인간은 말을 함으로써 동물과 구분된다는 계몽주의적 시각과도 그리고 ‘언어의 구조에 대한 해부는 인간에 대한 해부이다’라는 20세기의 언어학 혁명과도 전혀 다른 시각이다. 즉 인간은 말을 함으로써 이성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말을 갖지 않는 어떤 상태, 따라서 아무런 역사도 갖지 않는 상태를 거친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유아기’이다. 하지만 아이는 동물처럼 언어를 갖지 않은 것이 아니라 현실태로만 언어를 갖지 않을 뿐 잠재태로는 언어를 갖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인간은 우선 언어 안에서 그리고 언어를 통해 주체로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유아기와 언어는 하나의 원환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본디 인간적인 것이란 순수한 언어로부터 담화로의 이행에 다름 아니며 그리고 이 돌출이, 이 짧은 순간이 역사이다. ‘언어’ 안에는 이처럼 언어/담화 사이에, 기호론과 의미론 사이에 근본적 단절이 있다는 그의 생각은 20세기 언어학 혁명 그리고 그에 입각한 역사의 배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깔려 있으며, 이것은 동시에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적 독해로 이어진다. 즉 언어로 상징되는 인간의 원초적 경험은 구조화된 전체나 총체성의 연속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단절과 도약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언어를 통해 짐승과 구분(짐승은 이미 ‘언어’속에 있다)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단절되고 소외당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는 존재해하지만 그것을 전달할[나눌]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달[나눔]을 위한 수단은 존재하지만 이러한 전달[나눔]은 아무것도 전달하지[나누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 아마 이 말을 인터넷을 넘어 아이 폰이나 트위터 등 온갖 것이 무엇인가 진리를 나눈다고 속삭이고 있는 우리 시대에 대입해 보는 것보다 더 아감벤의 진단을 확증해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사유하기를 거부해온 것들. 이처럼 이 책은 벤야민, 하이데거, 마르크스, 헤겔, 아도르노 등에 대한 재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난 1980년대 이후 우리의 지성계에 여백과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아도르노와 벤야민에서의 방법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4장 ?왕자와 개구리?를 변증법과 총체성 그리고 매개 등이 개념과 관련해 그리고 이에 기반해 우리 문학계의 이론의 한 축을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는 리얼리즘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촉구하고 있는 매우 논쟁적인 글이다. 이 글에 따르면 벤야민의 지적 후계자로 알려져 있는 아도르노는 아감벤에 따르면 벤야민에 대한 ‘마녀’ 재판관 비슷하며, 총체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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