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육체만 할 수 있다.
육체만 ‘누구’이자 ‘어떻게’일 수 있다”
거듭 살고 거듭 죽는 몸으로,
거듭 무너지고 거듭 세워지는
미로를 충실하게 헤매기
1980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뜨거운 시적 열정으로 독보적인 시력을 다져온 시인 김정환의 스물여섯번째 시집 『황색예수 2―거리 디자인』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595번째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세 권에 걸쳐 출간되었던 ‘황색예수’ 장편연작시(합본 『황색예수』, 2018)에 이어지는 것으로, 유장한 호흡으로 써 내려간 128편의 시가 총 3부로 나뉘어 실려 있다.
“40여 년 전 『황색예수』는 신약 위주이고 아무래도 시간적이었다”면, “『황색예수 2』는 무척 공간적이면서 구약까지 품”(‘시인의 말’)음으로써 그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예컨대 시집을 이루고 있는 세 개의 부 중 2부 ‘현대‧구약‧도해’을 살펴보면 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노아, 삼손과 델릴라, 욥 등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집, 상가, 병원, 지하철, 식당 등의 생활공간에 가로놓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오랜 세월 동안 해석과 합의를 거쳐 보편화된 성서 텍스트와 개인적 경험으로 구성되는 현실의 삶을 십자로 교차해가며 촘촘하게 짜낸 그의 작품들은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부제 속 ‘디자인’이라는 표현을 상기시킨다.
예술은 “태생부터 정직하기 때문에 삶의 마지막 보루가 될 수 있”으며 “자본주의와 싸우는 최후의 예술은 디자인”(『뉴시스』 기사, 2011년 1월 12일 자)이라고 일찍이 내다본 시인답게, 전반적인 시집의 구성 또한 치밀하다. 구약의 내용을 주축으로 삼는 2부 앞에 배치된 1부 ‘하나의, 장면인’에서는 문학, 미술, 음악 등을 향한 시인의 눈길이 돋보이는데, 부의 앞과 뒤에 붙어 각각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역할을 하는 두 작품의 제목에 ‘바가텔(가벼운 피아노 소곡)’이 녹아 있다는 점은 이러한 특징을 환기한다. 한편 3부 ‘비켜서는 섬’은 “폼 잡지 않고 다만/비켜서는 형식”(「서序」, p. 286)을 취함으로써 시집에 적절한 느슨함을 불어넣는다.
내가 나의 총체를 찾아 돌아다니는
미로가 나의 총체이다.
즐겨 찾는 미로이다.
괴팍하고 서투른 스웨덴 터치쯤의
피터 팬이 출몰하는 재탄생,
나의 미로에 미혹되는 방식으로 내가 그 미로를
빠져나오는 나의 총체이다.
흐린 음악이 그리 영롱했던 까닭과
거꾸로인 까닭
겹침이 나아가는
미로이다.
[……]
오늘 미로의 사정이 저마다 있고
동일은 너무 무지막지해서 동일한 무작위지.
나 홀로, 나 홀로가 이리 듬직하고
장하다.
―「미로 활성과 동그라미 등식等式」 부분
생과 사, 성과 속, 미와 추, 애와 증 등이 어지러이 공존하는 세상은 마치 복잡한 미로와도 같다. 심지어 이 미로는 영영 완공을 기약하지 못한 채 거듭 무너지고 거듭 세워지기를 반복한다. 기존의 경로와 굽이가 사라졌다가 새로운 형태로 생겨나는, 즉 끊임없이 디자인‘되어가는’ 이 미완의 미로를, 김정환은 충실하게 헤맨다. 이때 시인의 목적은 지름길이나 탈출구를 찾는 일이 아니다. 미로 속 통로를 전부 걸어보는 것, 미로의 벽면을 하나하나 쓸어보는 것, “거듭 살고 거듭 죽는 보편적 특수자”(정한아)인 예수가 그리했듯 길마다 녹아 있는 삶들을 모조리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 어떤 디테일도 빠뜨리거나 생략하지 않으려 몸소 움직이는 이 의도적인 ‘요령 없음’은 “몸으로 하는 모든 장르에서/서툰 몸이 한 수 위일 수 있”(「아가雅歌―불륜」)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포용력은 아무리 비참하더라도 끝끝내 현실의 편이다. 치밀어 오르는 울음과 눈에 아로새겨지는 화려한 패배를 함께 다 삼켜버리고 이전과 같은 속도로 다가오는 모든 길을 밟는 것. 보아라. 진짜로 현실주의자가 되기가 이렇게 어렵다.
―정한아, 해설 「뱀의 혀」에서
여전한 희망의 이름으로 돌아온
지금 여기의 황색예수
“‘신’이라는 말을 비유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오늘날, “김정환은 왜 아직도 예수를 시에 겹쳐놓는다는 말인가?”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시인 정한아가 던지는 물음은 독자로 하여금 1980년대 민중 현실과 예수 수난사를 겹텍스트화하는 과정에서 호명되었던 김정환의 ‘황색예수’가 지금 여기로 다시 소환된 까닭을 고민하도록 한다. 그리고 답은 간단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폭력과 상처가 현실 곳곳에 여전하기 때문이다.
세기를 달리하며 많은 것이 달라진 듯하지만 시대의 균열과 멍울은 완전히 극복되지 못했고, 이를 자각할 때면 마치 오늘이 옛날과도 같다는 기시감이 야기된다. 그러나 “오늘이 이리 옛날이었던가 아니라,/옛날이 이리도 생생하게 매일매일 되살아나 왔던가이다”(「실낙원, 그 후의 그러나―박현수&노원희 부부께」). 봉합되지 않은 상흔의 틈으로 거칠고 지리멸렬한 옛날이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상 황색예수 또한 소멸과 부활을 멈출 수 없다. 대책 없는 위로와도 성급한 매듭과도 “개과천선 없는 미래 전망”(「고전적―선배, Who’s Who」)과도 거리가 먼 황색예수의 단단함은 여전히, 희망이다.
처음의 크기가 늘 지금 처음의 크기다.
돌아볼 때만 옛날이 야만이다. 돌아보기 때문이지.
결코 부드러울 수 없다.
그건 늘 지금 처음의 크기에 우리를 맞춰나가는 일이거든.
돌아보면 나아가는 일에 반복이
용납되는 것처럼 보인다.
반복 또한 결코 부드러울 수 없다.
영혼을 팔았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희망을 팔아먹은 것 아닌지
자문하면서 시작되는
부드러움이 분명 있을 것이다.
―「용납」 부분
과거의 디자인을 통과하며
가까워지는 오늘과 내일의 거리距離
걸작 그림이 자신의 주거를 강요한다. 굳이 찾아서
보지 않아도 여러 차례 여러 기회와 경우와 용도로
눈에 띄는 그것이 한 번도 홀로 존재하지 않고 전시장
풍경을 상품 광고를 삽화 쪽과 세부도 전체를
출토지와 성당 제단과 명승지 사찰 등산복과 최소한
액자를 거느린다. 홀로 있는 경치와 달리 각각 숱한
실내디자인들을 뗄 수 없게 거느리고 그 디자인들도
좀체 잊히지 않는다, 어떤 때는 걸작보다 더 그렇고
그런 사실이 걸작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의 합으로도
자본주의가 극복될 수 없는지 두고 볼 일이다.
―「불과」 부분
예술 전반을 향한 시선이 두드러지는 이번 시집에서 특히 강조되어 있는 것은 ‘디자인’에 대한 각별한 관심으로, 그의 작품들은 ‘만년필’(「근조謹弔가 날씬한 고대」), ‘선풍기’와 ‘흑백텔레비전’(「국산 1호」), ‘책’(「Viking Portable Library Dante Design」) 등 일상적인 사물의 모양새를 세밀하게 포착하고 있다. 소소한 시설부터 높다란 건물까지 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이 곧 디자인의 산물이라는 점을 고려하건대 김정환 시의 이러한 경향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현재가 단순히 “겹겹이 쌓인 시간의 체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할 때, 즉 “현실의 주체가 당연하게 지나온 과거의 ‘디자인’과 마주쳐”(정한아, 해설 「뱀의 혀」) ‘생경함’을 느낄 때 기억은 재규정된다. 이렇게 재규정된 기억을 “예민한 나침반”(「계보와 겨울밤, 그리고 강의와 미완」) 삼아 시인은 거리를 걸으며 꾸준하게 나아간다. “지식도 지식의, 추억도 추억의/전성기로 돌아가고 싶지만”, 거리는 구불구불할지언정 앞을 향해 뻗어 있기 마련이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