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 서평
박이문 선생의 시는, 시 그대로 그의 철학이다.
산문과 운문이 서로 섞여 있고, 팩트와 상징이 서로 침노하고, 절망과 소망이 서로 껴안고 있는 혼돈 속의 정연한 질서!
전 4부로 나누어진 시집은 제1부 ‘생명’으로 시작하여, 제2부 일상, 제3부 인생, 제4부 이국 그리고 서정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은 창조와 생명의 출발보다는, 이미 창조된 생명의 보존을 향한다. 이른바 생태계의 움직임이다. 생태계에 대한 관심은 곧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며, 그 안타까움은 문명 비판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엄청난 분노로 분출된다.
이 시집에 담은 작품들은 14편을 빼놓고는 저자가 모두 2006년 여름에서 2010년 가을 사이에 쓴 것들이다. 젊은 시절의 작품들은 모더니즘의 분위기도 풍기고 있으나 최근의 작품들은 간혹 당황스러울 정도로 직설적인 화법으로 환경 위기를 고발하고, 인간의 야만을 꾸짖는다. 그리고는 근본적으로 시인 자신에게 질문한다. 냉정한 두뇌의 관찰이 심장으로 녹아들어 우주와 자연의 암인 인간의 생태환경을 바라보며 슬픈 심장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 슬픈 심장의 시인은 마지막 불꽃으로, 그 불꽃의 언어로 자신에게,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 의미를 찾고 유지하는 것이 대체 이 세상에서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 구성 및 내용
이 시집에는 총 4부 96개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1부는 생명, 2부는 일상, 3부는 인생, 4부는 이국 그리고 서정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저자의 환경철학, 일상생활, 인생관조, 그리고 이국정서를 엿볼 수 있다.
이 시집에 담은 작품들은 14편을 빼놓고는 모두 2006년 여름에서 2010년 가을 사이에 쓴 것들이다. 14편의 작품은 시인이 긴 외국에서 떠돌이 삶을 접고 서울에 돌아와서 1950년대 중반기부터 1961년 다시 서울을 떠나기 전 6년 동안 발표했던 시 가운데 남아 있는 것들이다. 당시 시인은 스크랩북에 시인이 발표했던 작품을 정리해 두곤 했었다. 놀랍게도 그 중 얼마가 남아 있었다. 그것들에 대해서 시인은 각별한 느낌을 갖고, 그런 이유에서 이 작품들에 한해서, 가능한 한 그것들을 발표한 시문, 잡지, 월간, 계간지의 이름과 날짜를 명시해두기로 했다. 시 몇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아로 자란 코끼리의 분노
인도의 밀렵꾼들이 상아를 팔아 돈을 벌려고 어미 코끼리들을 마구 죽였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이 밭을 만들려고 코끼리들의 거처인 숲에 침입해서 나무를 베고, 숲을 밭으로 바꾸어 코끼리들은 생존의 터전을 잃었다
어미 아비를 잃어 고아가 된 새끼 코끼리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숲에서 마을로 나왔다 그들은 시골 마을에 몰려와 보이는 대로 뒤져 먹고, 닥치는 대로 길고 힘센 코로 들이받고 부순다 동네 사람들에게 아비 어미를 잃은 어린 코끼리들은 분노와 원한, 복수심에 차 있다
분노에 찬 어린 코끼리들은 물건, 동물, 사람도, 집도, 먹을 것도, 먹지 못할 것도, 그리고 또 그들의 사육사들까지도 코로 올려 높이 공중에 던지고, 땅에 떨어지면 바윗돌 같은 발로 밟아 죽인다 부모의 따뜻한 보호, 사랑도 없이 자란 분노 때문이란다 아비 어미의 가정교육도 없이 자란 정신적 상처 때문이란다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잘 살려고, 아니 그냥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코끼리를 죽인다 사람들은 정력에 좋다는 소문을 듣고 코뿔소를 사냥한다 사람들은 재미로 동물을 죽이는 스포츠를 즐긴다 생명을 죽임으로 삶의 환희를 느낀다 인간은 정신병에 걸렸고, 고아 코끼리들은 분노한다
코끼리, 코뿔소를 쏘는 밀렵꾼을 쏴라
재미로 사냥하는 사냥꾼을 사냥하라
생명의 이름으로, 인간의 이름으로!
시신기증등록을 하고 나서
세브란스병원 해부학과 사무실
시신기증등록 수속을 한다
약 십 분이 걸렸다
서류 한 장을 내고 밖에 나오니
그 무게의 만 배보다도 더 몸은 가볍고
가벼워진 몸보다 십만 배 더 편해지는 마음
복도에는 바삐 오고가는 의사와 간호원
휠체어를 타고 서성대는 환자들
환자들을 찾아온 수많은 가족과 친지들
병원 문을 나오니 피부에 닿는 이른 봄바람
서로 부딪치고 비키면서 어디론가 바삐 가는 수많은 행인들
그리고 밀리고 엉키고 꼬리를 물고 달리는 자동차 물결
나의 소원
아직도 잘은 모르지만
비우고 싶다
아직도 확실하지 않지만
텅 비우고 싶다
모든 것을 아주 털어버리고 싶다
암만 해도 잘은 모르겠지만
꼭 알고 싶다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싶다
아직도 무엇인가 허전하기에
쓰고 싶다 신선한 시를
네팔, 쿠마리 여신의 집
초경 이전까지 그녀는 네팔의 여신으로서 숭배를 받으며 작은 사원 같은 이 집 2층에 갇혀 혼자 산다 그녀가 초경을 치른 직후, 다시 여느 아가씨가 되어 부모의 집으로 돌아 갈 때까지 몇 년이고 그녀가 보는 세상은 밖의 세상과 차단된 그 방안뿐이며, 그녀가 만나는 사람은 그녀를 시중하는 늙은이 몇 명뿐이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그녀는 하루에 한 번 정해진 여 분 동안 집안 뜰을 향해 난 문을 살짝 열고 밖의 세계와 시각적으로 접할 수 있다
관광객들이 여신의 얼굴을 보러 모여들었다
봤다 초경을 하지 않아 아직 여신으로 남아있는 소녀가 방문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 봤다 그리고 나도 봤다 그 여신을, 앳된 그 여신의 웃음 진 얼굴을
초경을 하면 그녀는 여신이기를 멈추고, 여느 소녀로서 제집으로 돌려 보내지고
그러고 나면, 여신이었기 때문에 결혼도 어렵고 윤락의 길을 걷게 되기 쉽단다
아! 잔인한 관습이여! 아 어둠의 믿음이여!
잠깐 본 그 철모르는 어린 여신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생각만 해도 애처로운 그녀의 운명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상처
비슷한 사람이 겨냥한 총탄이
병사의 가슴에 녹슬어
모두가 돌아갈 언덕에는
눈물이 내린다
독한 술잔에 얼큰해진 의식적 망각
도시의 골목마다
바람에 너덜거리는 철조망
철조망 같은 상처
그 자국마다
어느 보초의 칼끝 같은
노여움이 솟는다
하늘이 찢기면
꽃 보다 고운 별이 뜰 것인가
아직
피 엉킨 상처는
어둔 하늘을 노리며
포구처럼 열린
가슴에도 지금
눈물 같은 비가 내린다
(문학예술,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