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다시 사랑에 실패할 인간
홀몸을 부둥켜안고 죽는 삶의 거짓말
나는 직업이 죄인이다
누구보다도 죄를 잘 짓는다
- 「푸른 손의 처녀들」 부분
“여전히 젊음의 중심을 관통하는 중”(문학평론가 권온)인 시인 이이체의 두번째 시집 『인간이 버린 사랑』(문학과지성사, 2016)이 출간되었다. 2008년 『현대시』에 「나무 라디오」 외 네 편의 시를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한 이이체는, 2011년 첫 시집 『죽은 눈을 위한 송가』에서 ‘출향(出鄕)’과 ‘이별’을 모티프 삼아 “침묵하는 절규의 기록들을 촘촘히 엮은”(문학평론가 장성규) 시들을 선보이며 “깊이 있고 감각 넘치는 시”(문학평론가 허윤진)라는 호평을 받았다. 지난 시집에서 영원히 삶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소년의 순수와 실존의 덧없음을 통감한 현자의 얼굴 양면을 모두 보여주었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사랑의 뼈와 내장까지 다 들여다본 이후의 사랑, 불가능한 것임을 알면서도 사랑으로 뛰어드는 인간의 욕망에 깊이 천착한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시인 강정은 이를 두고 “신성마저 발가벗기려는 태생적 죄인”으로서의 시인의 운명을 예감하기도 했다. “어떤 말은 하고 나면 입안이 헐어버린 것 같”은데도 “말을 잃는 병이 아니라 말을 앓는 꿈”(「독어(獨語)」)에 시달리는 이이체의 50편의 독어(獨語/毒語)가 펼쳐진다.
절뚝거리는 사랑, 발음될 수 없는 감정
이 감정은 당신이 발음해봐
사랑에서 참과 거짓을 가리고 싶을 때
당신은 나에게 요구했다
나에게는 농도와 밀도가 더 중요했다
내가 바로 거인의 입과 혀,
무슨 말이든 당신이 만질 수 있었더라면……
욕망하지 않는 사랑을 배우고 싶었다
욕망할 수 있어서, 욕망할 수밖에 없어서
무서웠다
- 「תלובש」 부분
알고 있다,
눈물 흘리지 않고는 못 배길 사랑의 미신이여
못 믿어도 믿어야 할 우상들이여
언제나 가슴 시린
거짓말들만 몇 번이고 다시 곱씹었더랬지
축축하지만 메마른, 비 오는
북국의 겨울에 한 입 머금은 심장
그 더운 입술이 그리워서
당신은 내 앞에서 울었고 나는 울지 않았지
- 「편애, 사랑에 치우치다」 부분
이이체는 이번 시집에서 사랑의 실체를 집요하게 탐색해나간다. 그리하여 결국 마주하는 결론은 ‘없음의 있음’. 시인에게 사랑의 흔적은 어느 한편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처럼 더 깊이 사랑할 수는 없을 거라는 환멸과 자책의 얼룩, 그리고 그 절름발이 사랑을 드러내고야 마는 가혹한 진심으로 남아 있다. 시인은 없는 사랑을 있다고 믿는 “미신”이야말로 진짜 사랑임을 깨닫는다. 이이체의 시들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감정에 혼자 사무쳐 미치고, 다시 만질 수 없는 살갗과 다시 들을 수 없는 목소리에 홀로 중독된 화자가 곤두박질치는 어떤 “심연”을, 그 무모함과 계속되는 고통을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사랑이 상상하는 사랑의 바깥
당신과 재회했다. 이별은 헤어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래 살게 되는 병에 걸리게 한다. 내 기억은 당신에게 헤프다.
[……]
누가 버린 목어(木魚)를 주웠다. 살덩어리가 단단해서 더 비렸다. 속마음을 다 드러내면 저토록 비리게 굳어버린다던, 당신의 이야기. 이따금씩 부화하는 짐승의 말.
지금 쉬운 것은 훗날에는 아쉬운 것이다.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
심장은 몸이 아니라 몸의 울림이다.
내가 아프면 당신도 아파하고 있을 거라고 믿겠다.
그 아픔에 순교하는 심장이 사랑이다.
- 「당신의 심장을 나에게」 부분
이이체가 자신의 시에서 다양한 몽상의 형식으로 변주해온 “‘경험한 적 없는 기억’으로서의 본래적 실체에 대한 그리움”(문학평론가 장은정)은 사랑에 대입되었을 때 가장 절실하게 구체화된다. 과거의 연인과 재회하고 묵은 상처를 꺼내며 깨닫는 어떤 사랑. 한때 서로에게 진심을 모조리 내어주고 마치 영혼이 결합된 듯 나누었던 애틋한 사랑보다 더 진짜 사랑은, 헤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아픔에 순교하는 심장”일지도 모른다. 이이체는 결핍과 모순 속에서 상처 받던 모든 시간들을 수용하고 사랑하게 되는, 사랑 바깥의 사랑을 발견한다.
기필코 쓰러지겠다는 신념
살아남는다는 것은 죽음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나는 번역될 수 없는 사랑의 한 구절이다
어느 부족의 여자들은 뺨 위에
눈물이 흐르는 길을 화장하는 관습이 있다
슬프므로 나는 기둥이 되지 않겠다
기필코 쓰러지겠다
- 「연옥의 노래」 부분
그의 많은 시가 ‘이별’을 다루고 있지만, 이이체 시의 독법은 사랑을 잃고 난 뒤의 상실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시에는 지독할 만큼 집요하게 실체를 파고드는 시인의 자세, 스스로를 무너뜨리면서까지 사랑을 가식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랑을 잃은 자의 어둠, 해선 안 될 말과 저질러선 안 될 마음속 사태들, 말할 수 없는 “투명”들을 우리 눈앞에 전시한다. 강정은 이를 “치정에 목매는 유치한 복수심으로만 매도하면 곤란”하다고 말하며 “시인은 순연함을 잃지 않는다. 오로지 사랑 자체에만 몰두해 사랑의 비열하고 모순된 알몸과 마주치고, 그것으로서 도저히 씌어지지도 전달될 수도 없는 사랑의 말들을 ‘투명한 혼란’ 속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치장하지 않은 “투명”을 들여다보다가 미쳐버린 자의 언어, 그 괴물의 자기고백이 오늘도 절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