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러 곳에서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폭력과 차별로 얼룩진 세계를 꿰뚫는 누스바움의 예리한 시선
혐오, 동물권, 여성, 인권 등 세계의 절실한 문제들을 끌어안고 꾸준히 연구해 온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페미니즘 철학서가 출간됐다. 『여성을 억압하는 세계』는 개발도상국 인도에서 살아가는 빈곤 여성의 삶과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낸 기록이자, 불평등한 세계에 끊임없이 제기되는 물음을 헤쳐 나갈 명석한 응답이다. 누스바움은 너무나 오랫동안 여성을 수단으로만 취급했던 정치, 사회, 종교, 가족의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젠더 불평등과 빈곤이 교차하는 인도에 방문한다. 그곳에 만연한 차별과 폭력, 그리고 불평등의 흔적들이 이 책에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누스바움이 야심 차게 기획한 이 연구는 억압당하는 모든 여성을 가로질러 모든 인간을 향해 나아간다.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또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누스바움은 이 질문에 기반한 ‘잠재역량 접근법’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복권하기 위한 윤리 정치적 기획을 펼친다. 여성은 줄곧 국가, 가족, 공동체의 목적에 복무하는 수단으로 여겨졌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겨 왔다. 이 책은 바로 그 상실의 역사를 짚어보며 철학이 실천과 만나는 자리에서 새로운 세계를 모색한다.
“빈곤이 젠더 불평등과 결합될 때
그 결과는 핵심적인 인간 역량의 심각한 실패다.”
빈곤의 격랑 속에서 출발하는 페미니즘 철학
누스바움은 인도에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찾아간다. 격무와 가사와 자녀 돌봄의 부담을 지고 살아가는, 자녀를 부양하면서도 법적으로 아무런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여성들을. 특히 누스바움이 포착한 두 여성 바산티와 자얌마는 너무나 기구하고 애처로운 삶을 이어간다. 그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 경제적 계층의 가녘으로 내몰렸다. 게다가 그들을 부양할 남편도 자녀도 없어 빈곤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삶은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구조적 폭력과 제도적 불평등을, 그리고 철학과 경제의 논리가 여성의 삶과 유리된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누스바움은 바산티와 자얌마의 삶을 들여다보며 가부장제의 뿌리가 단지 전통 문화에만 내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가부장제는 제도, 교육, 경제 구조, 종교까지 모든 사회 구조에 편만해 있다. 그의 철학은 이러한 복합적 억압이 여성의 자유와 존엄성을 어떻게 집어삼켰는지 면밀하게 추적한다.
“우리는 구자라트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어떤 단순한 방식으로도 칭찬할 수 없다.
그것이 힘없는 많은 사람을 뒤처지게 만들고,
많은 자영업 여성의 생계를 잃게 했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이라는 목표에 가려진 불평등의 양상
전 세계에서 ‘경제 성장’이라는 목표는 늘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경제 성장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시민들을 향해 강력히 촉구한다. 경제 변화를 호의적으로 생각하기에 앞서 모든 시민을 위해 정치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경제 성장에 어떤 제약을 두어야 하는지를, 경제가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모든 시민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어떤 자격을 부여받아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여성의 현실은 경제 성장 담론의 바깥에 놓여 있다. 경제 성장을 내세워 여성의 노동을 정당하게 보상하지 않고, 여성의 교육·건강·정치 참여 문제를 지속적으로 무시하는 현실은 경제 성장 담론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 세계관에 기반하는지를 보여 준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품은 누스바움은 ‘인간 기능의 핵심역량’ 목록을 제시한다. 이 목록은 여성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다. 경제 성장을 고려하기 전에 이 조건들을 먼저 점검해야만 한다. ‘생명’, ‘신체 건강’, ‘감정’, ‘협력관계’, ‘놀이’, ‘환경 통제’ 등 누스바움이 제시한 열 가지 핵심역량 목록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이는 여성들이 겪는 결핍에 관한 기록이며 여성의 존엄성을 복권하기 위한 실천 좌표다. 세계의 모든 공동체는 여성들이 이 핵심역량들을 갖출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고 협력해야만 한다. 누스바움이 말하는 젠더 정의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