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 제국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말 대신 배로 새로운 제국을 설계한 쿠빌라이 칸
1271년,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와 함께 원나라의 수도 대도(베이징)로 향했다. 배를 타고 인도양을 건너려 했지만, 기술과 인프라가 부족했던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3년에 걸쳐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들은 칭기스 칸이 창안한 획기적인 역참 제도를 이용했다. 칭기스 칸은 이 제도로 동방과 서방을 하나의 통신·수송 체계로 통합했지만, 이는 육로에 국한되었다. 그리고 20여 년 뒤인 1292년, 마르코 폴로는 중국 남해안에서 페르시아만까지 2년간 중국의 최첨단 정크선을 타고 고국 베네치아로 돌아갔다. 그사이 세계는 분명히 바뀌어 있었다. 말 위에서 아시아 전역을 누비던 유목 제국은 이제 해로를 통해 세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 책 《바다의 황제》는 바로 그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인물, 쿠빌라이 칸에 관한 이야기다. 칭기스 칸의 손자이자 원나라의 창건자인 그는 유목 제국의 후계자이면서도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해양 제국을 설계한 지도자였다. 또한 몽골에서 최고 통치자를 일컫는 칭호 ‘달라이 칸’, 즉 ‘바다의 황제’를 현실로 만든 유일한 인물이었다.
세계적인 몽골사 권위자 잭 웨더포드
쿠빌라이 칸에게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발견하다
“이 책은 내가 쓰려고 했던 것과 다르다. 20년 동안 몽골제국의 성장을 연구한 뒤 나는 내가 그 쇠락 이야기라고 예상한 것을 시작했다. 나는 먼저 쿠빌라이 칸이 일본과 자바의 해상에서 패배하고 베트남의 육지와 바다에서 패배한 것을 살폈다. 그러나 자료를 더 깊이 파고들수록 서술되기를 기다리는 다른 이야기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쇠락의 이야기이기는커녕, 중국과 세계의 이례적인 상업 및 문화 발전의 한 세기를 여는 것이었다.” ― 〈감사의 말〉에서
잭 웨더포드는 대표작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를 비롯해 《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 등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몽골사 권위자다. 그동안 칭기스 칸과 몽골제국이 세계사를 어떻게 바꿔왔는지에 천착해온 그는 이번 책에서 쿠빌라이 칸의 일대기와 그의 업적을 통해 사뭇 다른 몽골제국을 그린다.
일반적으로 원나라 시기부터 몽골의 쇠락이 시작되었다고 인식한다. 저자 본인조차도 이 책을 몽골의 내리막을 쓰기 위한 기획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연구가 깊어질수록, 이 시기가 오히려 새로운 세계 질서의 출발점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저자는 밝힌다. 유목 제국의 확장이 끝난 시점이 아니라 제국의 방향성이 바뀐 분기점, 즉 유목 제국이 해양 제국으로 나아간 역사적 전환기였다는 사실이 점점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으로 그동안 육지에 국한된 유목 제국으로만 여겨지던 몽골제국과 원나라의 또다른 모습을 펼쳐낸다. 더불어 우리에게 익숙한 고려의 역사, 신안 난파선, 일본 정벌 등의 이야기를 색다른 맥락에서 풀어낸다.
몽골인답지 않았던 쿠빌라이
유목의 전통 바깥에서 형성된 리더십
이 책은 쿠빌라이 칸의 일대기를 따라 그가 이루어낸 역사적 전환의 의미를 밝힌다. 우선 그의 몽골인답지 않은 기질과 남달랐던 성장 과정에 주목하며, 그가 최종 승자가 되어 몽골을 새롭게 혁신할 수 있었던 요인을 구석구석 발견한다. 쿠빌라이는 어린 시절 대칸이 될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겨졌다. 어머니를 닮아 피부가 까무잡잡해 겉모습부터 여느 몽골인들과 사뭇 달랐다. 잔혹하고 무(武)를 숭상하며 전투에 나가 명성을 드높이고 싶어했던 또래들과 달리, 학문을 공부하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무엇보다 그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법을 알았다.
이러한 면모를 알아본 어머니 소르콕타니는 쿠빌라이에게 몽골 전통과는 다른 방식의 교육을 시도했다. 즉 중국식 교육을 시키고, 도시 계획과 행정, 철학과 종교를 익히게 했다. 그리고 솔선수범해 바이칼호를 거쳐 북극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소르콕타니가 보여준 혜안과 모범은 쿠빌라이가 장차 중국을 점령하고 바다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쿠빌라이는 44세가 되던 1259년, 마침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그토록 잘 따르던 형 뭉케 대칸이 사망하자 그는 제위 경쟁에 나서지 않고 뭉케의 마지막 지시사항이었던 남송 정복에 집착했다. 하지만 정치적 안목이 뛰어난 아내 차부이가 적극적으로 제위 경쟁에 나서도록 독려했고, 결국 쿠빌라이는 대칸이 되어 원나라를 세운 뒤 마침내 형제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다. 이후 쿠빌라이 칸은 그동안 쌓아온 다양한 경험과 관점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제국을 설계해나가기 시작한다.
몽골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불가능해 보였던 남송 정복을 성공하다
“전쟁의 새날이 밝았고, 쿠빌라이는 결연히 승리의 의지를 다졌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어떻게 하면 안 되는지는 알았다.” ― 7장 〈중국의 강해장성〉에서
쿠빌라이 칸이 경쟁자들을 물리친 뒤 가장 먼저 마주한 과제는 남송 정복이었다. 장강을 천연 방어선 삼아 오랫동안 버텨온 남송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기존의 기병 중심 전략으로는 한계가 뚜렷했다. 장강을 건너 남송을 공격하려면 강력한 수군이 필요했다. 대규모 수군을 건설했으나 훈련이 부족하고 커다란 강에 적합한 배를 쓰지 않았던 금나라의 실패 사례를 교훈 삼아 쿠빌라이 칸은 전면적인 체제 개혁에 나선다. 고려 기술자들에게 배를 만들게 하고, 남송에서 수군, 무기, 의학 등 관련 지식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이며 수군을 새로 편성했다.
무엇보다도 수군 건설을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근본적인 혁신을 이룬다. 기존의 조공 중심 재정을 상업 기반으로 전환해 안정적인 세원을 확보했고, 지폐를 발행해 통화 시스템을 효율화하며 행정 제도를 정비했다. 이는 몽골의 전통을 고집하지 않고 남송, 아라비아 등 외국 출신 전문가를 비롯해 다양한 인재를 적극 등용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결국 그는 불가능해 보였던 남송 정복을 성공해내고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한다. 바야흐로 몽골이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의 무대를 바다로 옮기고
해양 제국의 모형을 창조하다
“이제 바다를 장악하는 나라가 상업을 장악하게 되었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 되었고, 쿠빌라이 칸은 그뒤에 나오는 해양 국가들의 모형을 창조했다.” ― 23장 〈이윤과 쾌락, 시와 허영의 항구들〉에서
쿠빌라이 칸은 남송을 정복한 뒤 일본, 베트남, 자바 등을 침공해 영토 확장을 꾀했지만, 기후와 낯선 자연환경 등 여러 악조건 탓에 실패하고 만다. 저자가 이 시기를 몽골 쇠락의 시작으로 여겨왔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를 겪었을지언정 그의 배들은 여전히 바다를 장악하고 있었다. 쿠빌라이 칸은 자신이 건설한 역사상 최대의 해상 함대를 바탕으로 사할린에서 호르무즈에 이르는 방대한 해로를 통제했고, 이는 곧 할아버지 칭기스 칸이 창안한 몽골의 육상 우편 체계를 해상으로 확장한다는 그의 비전을 실현했음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쿠빌라이 칸의 진정한 업적은 해양 실크로드를 열고, 그에 맞는 국가 체계를 확립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해양 제국을 정립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룩한 재정·해운 개혁으로 상업과 무역이 크게 촉진되면서 도자기, 향신료, 보석, 산업 원료 같은 상품이 남부의 주요 항구들로 운송돼 세계의 상인들에게 팔리고 외국으로 수출되었다. 무역망이 급속하게 확장되고 배의 크기와 투자 규모가 커지면서 제공되는 상품도 매우 다양해졌다. 또한 공장식 생산 체제가 조직되고 전문화되면서 책, 미술품, 비단, 차, 도자기와 같은 고급 상품이 대중 소비품으로 바뀌었다. 이 모든 변화는 강력한 함대를 운용해 전체 해로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렇게 쿠빌라이 칸은 역사의 무대를 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