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매일매일 찾아오지만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기적들에 대한 기록.” _이은규 (시인) 40편의 시와 그 시를 있게 한 문장들의 기록 ‘이제야’라는 필명으로 시를 쓰는 시인 이지혜. 2012년 계간 문예지 󰡔애지󰡕를 통해 등단했고 산문집 󰡔그런 사람󰡕 󰡔그곳과 사귀다󰡕를 냈다. 등단할 때부터 사용한 독특한 필명 ‘이제야’는 그녀가 좋아하는 단어라고 한다. 사전적 뜻은 ‘말하고 있는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인데 시를 쓰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고. 그의 말을 빌리자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들을 말言로, 그중에서도 특히 시詩로 표현해야 그제야 오롯이 ‘내 것’이 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는 시라는 건, 시를 쓰게 하는 순간이 있어야만 탄생한다고 한다. 시인 자신의 등단이 딱 그러했다. 우연히 알게 된 문인들 여럿과 통영을 다녀온 뒤 뜻밖에 떠오른 시상으로 적어나간 시들이 시 전문 계간지에 당선되면서 등단에 이르게 된 것이다. 등단 후 시를 써오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시란 가만히 앉아 있다고, 시를 한 편 써볼까 한다고 써지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이지혜는 시를 쓰며 수첩에 그 시의 배경이 된 결정적 순간들을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는데, 그 습관의 소산이 바로 이 책이다. 󰡔조각의 유통기한󰡕은 40편의 시와 그 시를 있게 한 문장들의 기록이다. 이 책은 산문 다음에 그와 짝을 이루는 시가 등장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각각의 산문은 시의 배경이 되는 순간, 또는 시가 탄생한 일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산문들은 단지 시를 쓰기 위해 아무렇게나 쓰인, 구겨버린 종이 위의 글이 아니다. 산문과 시는 각각이 완결된 글로서, 비슷한 듯 다른 듯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시인 이지혜는 독자에게 조금 더 다가가고 싶다는 바람으로 시집 대신 이러한 형식을 택했다고 고백한다. 어쩌면 한 문장으로도 대화를 하는, 시의 기적을 믿어봅니다 그런 날이 있다. 기억을 꺼내려고 사진 하나를 집었다가 찾으려 하지 않던 기억과 밤을 지새우기도 하는. 기억을 집어넣으려다 못내 아쉬워 제대로 다시 회상해본다. 기억은 또다른 기억을 소환해내고 어느덧 잊은 줄 알았던 기억마저 돌아와 있다. 기억이란 그렇게, 없는 듯 살다가도 꽤 열심히 어딘가에서 숨쉬고 있었음을 우연히 알게 되는 것이다. 이지혜는 이 책 전반에서 기억을 깊게 파고들며 탐구한다. 그에게 문장 쓰는 일은 사진첩에 사진을 담아두듯 기억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작은 감정, 작은 에피소드도 유난히 기억하고 싶던 그에게 문장이란, ‘움직이는 감정을 꽉 묶어두는’ 일이자 유한한 세계에서 순간을 지속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 문장과 기억의 엉킴으로 시간을 고정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바람을 온전히 이루기란 쉽지 않다. 흐르는 시간 속을 사는 우리의 감정은 세계를 따라 흐르며 움직이고, “문장의 세계란,/ 흐르는 것들 사이에서 흩어지는/ 우리에게는 달콤한 곳”(시 「문장의 세계」)일지라도 우리가 사는 ‘흐르는 세계’에서는 문장의 기억장치도 때로 오작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문장은 추억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시제가 변하면서 기억의 조각은 이미 달라져 있기 마련이다. 한때 서로에게 빛이었던 밤하늘의 달과, 시간이 갈수록 울창해지던 우리의 숲 자리는 그곳이 맞는데 왜 그곳에 조각을 맞추려 해도 맞지 않는 것인지. 퍼즐 조각은 낡지도 않았지만 전혀 다른 자리를 찾아야 할 것처럼 자리만 낡아져 있다. 옛 추억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조각의 유통기한은 이렇게도 짧다. _산문 「조각의 유통기한」 중에서 그래서일까? 억지로 과거의 퍼즐을 맞추려는 노력은, 때로는 억지로 기억 하나를 잃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리움에 과거를 지금으로 옮겨보지만 이윽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너의 벤치였는데 너를 앉혀도 너는/ 이제 다른 너”(시 「서로가 그때에서 사라질 때」)다. “서랍에 둔 한 조각은 맞추지 않을 때 빛났다”(같은 시)라는 작가의 체념에서 보듯, 재연이 불가능한 세계에서는 어쩌면 재연하지 않는 것이 가장 재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때를 믿은 채로, 완성되지 않은 마지막 조각을 안고 살아가면 되니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문장이라는 기억장치의 오작동에서 이지혜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바로 문장은 기록보다 사유에 방점이 찍힌다는 자각이다. 우리는 그 가능성에 관한 작가의 말을 듣게 된다. 가끔 문장을 써놓고 물끄러미 바라다봅니다. 다르게 기억하고 싶어 문장을 바꾸었다가, 이건 기억을 왜곡하는 거구나 싶어 다시 지우개로 지웁니다. 그렇게 솔직한 문장들을 써내려가고 내 마음의 소리를 듣다보니 시를 쓰게 되었죠. 그동안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문장을 써왔다면 시는 나를 잘 들여다보기 위해 써왔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란, 나만의 언어로 써내려가는 가장 솔직한 기록입니다. _‘작가의 말’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솔직히 말하기이다. 그리고 시를 쓰는 것은 문장들의 기록 속에서 가장 솔직한 ‘나’만을 남기는 작업이다. 곧 이지혜에게 시는 세계를 향해, 대상을 향해, 나 자신을 향해 끝내 포기할 수 없는 화법인 것이다. 이지혜는 “어쩌면 한 문장으로도 대화를 하는, 시의 기적을 믿어”본다고 말하고 있다. 󰡔조각의 유통기한󰡕이 어느 젊은 시인의 기억수첩을 넘어, 책을 읽는 당신의 기억수첩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 속에서 당신의 맨얼굴과 잊었던 기억들을 마주하고 그것과 솔직히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제야 비로소 작가가 말하는 기적은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