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인 공간
주관적인 장소
절대적인 풍경
시간이 아닌 공간을 보는 인문학의 공간론적 전회
당대 최고 지성이 펼치는 인문학의 향연
놀라운 인문학적 통찰로 깊이에 대한 갈망을 채워준다.
근대성에 대한 공간적 인문학적 탐색
이 책의 주제는 한마디로 공간을 통한 근대성 탐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우리 학계와 비평에서 시간의 흐름, 곧 역사적 관점에서 근대성을 고찰한 글들은 많이 나왔지만, 공간적 관점에서 이를 풀어놓은 책은 드물었다. 서영채 교수는 자신의 장기를 십분 살려, ‘풍경’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시대와 공간과 예술 장르를 거침없이 횡단하면서 유려한 문체로 근대성의 한 단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왜 풍경이 문제적인가
20세기 후반부터 공간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이론적 화두로 등장했다. 공간적 전회(spacial turn), 곧 공간에 대한 그리고 공간을 통한 사유는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와 함께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커다란 이론적 전환을 가져왔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서영채 교수는 왜 공간이 아니라 풍경에 그렇게 이끌리고 있는가?
저자는 이런 마음의 실체를 밝히고자, 홍상수의 영화에서 시작하여 스피노자와 뉴턴, 칸트와 헤겔이라는 징검다리를 거치고 마침내 네덜란드 풍경화에 다다른다. 거기에 가까이 가자 셰익스피어와 갈릴레이가 튀어나오고, 결국 그 배후에 있는 세르반테스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게 시공을 가로지르다 결국 도착한 곳은 바로 공간과 장소의 불일치였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객관과 주관의 불일치, 나와 나 자신의 불일치일 테니, 돌고 돌아 마침내 다다른 곳은 곧 일그러진 근대성, 저자의 표현으로는 바로크 근대성이었다. 여기에서 ‘풍경’은 바로 공간과 장소의 불일치를 ‘습격’함으로써 주체의 존재론적 간극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한다. 이제 저자의 서술을 따라 근대인의 운명을 향해 다가가보자.
각 장의 내용
1장에서는 한 사람이 풍경과 만나는 순간을 스케치한다. 풍경은 단순히 아름답거나 놀라운 경치가 아니다. 어떤 장소가 아무리 뛰어난 경치를 지니고 있다 해도 그냥 그뿐이다.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잊히지 않아야 비로소 풍경이 된다. 그렇기에 한 사람의 일상 속에 있는 평범한 장소나 장면이라도 잊을 수 없는 풍경일 수 있다. 풍경은 어떤 사람이 바라보는 시선 끝에 있는 장소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장소가 겹쳐져 격렬하게 부딪쳤을 때 태어난다. 저자는 이를 ‘풍경의 습격’이라고 부른다.
2장에서는 라위스달, 베일리, 램브란트, 프리드리히 등 근대초기 북유럽화가들의 작품 속에서 주체와 대상 사이의 위계 전도를 발견한다. 풍경화는 사람이 없는 그림인데 어떻게 그 안에 풍경의 시선이 담길 수 있는가?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하여, 풍경화는 그 장르 속성상 사람이 없어야 그 시선이 담길 수 있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주체와 대상 사이의 중요성의 위계는 뒤집어지고, 그런 점에서 근대성의 원리적 핵심을 체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3장에서는 잠시 공간(풍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돈키호테』를 중심으로 바로크 근대에 비로소 본격화된 신에 대한 관념을 분석하고, 그로 인해 구체화된 세 가지 인간상 - 광인(돈키호테), 바보(산초 판사), 속물(이들을 구경하는 세상 사람들) - 을 묘사한다. 근대에 이르러 신은 이제 만물을 주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원리로서의 신, 세계라는 시계를 만들고 나서 사라져버린 시계제조자(watchmaker, 시계공)로서의 신일 뿐이다. 이렇게 초월성이 사라진 시대에서 불가능한 이상을 꿈꾸는 돈키호테와 이상주의의 아름다움을 용납하지 못하는 속물 근대인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바보 산초 판사, 이들 모두는 근대성 자체가 지닌 비애, 특히 그 시발점으로서의 바로크적 우울을 상징한다.
4장에서는 갈릴레이와 파스칼, 뉴턴과 스피노자 등 근대 자연과학자와 철학자들의 공간 관념을 다룬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가지고 우주를 관찰함으로써 무한공간을 본격적으로 펼쳐 보였다. 파스칼은 그런 무한공간의 공포 속에서 신앙으로 회귀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신의 부재를 반증하는 것으로 읽힌다. 반면에 뉴턴과 스피노자는 자연과학과 철학에서 절대성의 새로운 거처를 제시한다. 그 거처는 신의 뜻이 구현된 스콜라적 자연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절대성이 되는 자연이었다. 이렇게 해서 절대공간이라는 관념이 탄생하게 되고, 신은 이제 객석에 숨어서 세계라는 무대를 바라보는 존재에 불과하게 되었다.
5장에서는 4장에서 구체화된 절대성의 탈(脫)신비화 과정이 칸트와 헤겔 그리고 루카치에 이르러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서술한다. 먼저 칸트는 네 가지 범주(양, 질, 관계, 양태)를 통해 네 가지 이율배반을 제시함으로써, 순수이성의 영역에서는 신을 추방해버리지만 실천이성의 영역에서 신을 다시 불러온다. 이런 관념을 소설과 미학 이론에 끌어온 것이 루카치였다. 칸트와 달리 헤겔에게 절대성은 실체이자 동시에 주체로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주체, 곧 주관성과 실체, 곧 객관성이 하나의 전체적 체계를 이룬 것이 절대성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무대와 객석이 사라져 구분되지 않는 연극, 모든 공간이 무대인 연극,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신이 세계라는 무대 안으로 들어온 연극에 비유할 수 있다.
6장에서는 장소가 지닌 상징성 및 그 너머에 숨 쉬고 있는 윤리에 관해 이야기한다. 장소에 대한 충동은 오디세우스로 대표되는 귀향의 서사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고향은 바로 주체의 고유성이 깃든 공간의 상징이다. 주체가 어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공간이 장소가 되지만, 이렇게 생산된 장소는 거꾸로 주체를 생산해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주체는 장소를 통해 무한공간을 공포를 해결했는가? 저자는 그저 한숨 돌렸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애써 무한성(무한공간)과 절대성(절대공간)을 담장 밖으로 밀어냈지만 그것들이 담장 밖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내가 속해 있는 장소가 진짜 내 것인가에 관한 회의 등이 장소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낳는다. 이것이 장소 너머의 공간을 사유하게 만들고, 이 자리에 풍경의 시선이 놓인다.
저자는 먼 길을 돌아 7장에 이르러서야 다시 풍경론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말하는 풍경이란, ‘낯설고 특별한 경치’가 아니라 주체에 의해 평소와는 다른 시선으로 포착된 장소를 의미한다. 전자가 낯익음에서 낯섦으로 이행해가는 데 반해 후자는 반대로 나아간다고 해서 저자는 이를 ‘두 번째 풍경’이라고 부르는데, 이 ‘두 번째 풍경’ 속에서 어떤 주체에게 장소는 더 이상 장소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관점에서 홍상수의 영화 <북촌 방향>의 클라이맥스 장면을 해석하는 곳은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다른 많은 문학과 예술 작품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풍경의 습격’을 받은 우리 근대인은 운명은 어떠한가? 8장에서는 이 문제를 윤리적 주체의 책임과 연관 짓는다. 신성한 존재의 계시나 예언 속에 존재하는 필연적 운명 같은 것은 근대의 핵심 원리와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날 운명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필연으로 받아들여진 우연을 뜻한다. 그리고 이 우연을 운명으로 만드는 것은 주관성의 힘인데, 이것은 시간적으로는 과거, 공간적으로는 장소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이 방향을 바꿔 미래를 향하게 될 때 운명에 대한 사랑, 곧 운명애가 생겨난다. 이 순간은 풍경의 문이 열리고 그것이 우리를 습격하는 순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근대를 사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운명애의 형식이자 풍경의 윤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