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 앳 시리즈 3권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출간
“정치가 실패하면 사랑이 무너진다. 예외 없이, 도처에서.”
★정희진 추천★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쓸 수 없을까.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매트릭스에서 질병과 돌봄을 둘러싼 구체성의 미학이 여기에 있다. 미시적 서사와 사회 구조를 치밀하게 교직한, 열정과 지성이 넘치는 불꽃 같은 책이다.
일상이 멈추고 의혹이 밀려왔다
맞벌이 부부와 어린 아이, 촉박한 하루하루 속에서 소확행을 건져 올리는 일상. 드라마 클리셰로도 쓰이지 못할 익숙한 풍경이다.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눈코 뜰 새 없는 직장인이자, 코로나가 한창인 시국에 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초보 학부형인 그녀는 어느 날 아침, 아이의 등교를 맡은 남편으로부터 날벼락 같은 전화를 받는다. "전부 취소하고 국립암센터로 와."(12쪽)
등교를 준비하던 아이가 코피를 흘렸고, 멈추지 않았고, 더 상급병원으로 이동하다가 국립암센터에 도착해 악성질환 진단을 받는다. 불과 반나절만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서문이 없다. 채비 없이 만난 사건에 ‘서막’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그날로부터 1년 6개월간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운 극적 긴장 속에서 24시간 대체 없는 간호를 이어가며 저자는, 어떤 엄마도 꺼낼 수 없던 어렵고 무거운 질문을 내놓는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것은 의리
업무 도중 다급히 빠져나온 그녀는 결국 회사로 복귀하지 못했다. 아이가 중병인데 엄마의 출근은 거론할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매달렸고 남편은 아내의 역할을 묻지 않았고 가족도 회사도 엄마의 간호를 격려했다. 1막에서 저자는 ‘모성’에 대해 묻는다. 모성은 천부적 재능인가? 모성이 남녀 구별 없이 옥시토신과 프로락틴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호르몬 반응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모성 신화가 굳건한 이유는 모성이 돌봄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모성 신화는 여성에게 손쉽게 희생을 강요하는 동시에, 각 여성의 삶이 지닌 복잡하고 특별한 경험을 일거에 삭제한다. 저마다 다른 엄마들의 삶을 워킹맘과 전업맘으로 양분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지독히 안일하고 편협하다”(55쪽)고 말하며, 작은 침상에서 온종일 한 몸처럼 붙어 고통을 함께하며 아이와 자신이 공유하는 사랑이 모성에 기반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결국 사랑은 내가 아닌 누군가의 필요를 내 필요보다 중요시하는 것이다. 나보다 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그리고 사랑의 이러한 속성이 바로 컴패션(compassion)의 토대일 것이다. compassion, 흔히 하듯 연민이나 동정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무척 아쉬운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누군가의 고통(passion)을 함께 한다(com)는 뜻이다. 대가 없는 간병, 조건 없는 돌봄이 바로 compassion의 이데아이자 눈에 보이는 실재다. 그리고 누군가를 통해 이 compassion을 한번 경험한 이는 인생을 살면서 다른 이에게 다시 그것을 되돌려주게 된다. 그렇게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법, 누군가를 돌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62쪽) 저자는, 자신의 돌봄이 모성에서 발현된 일방향이 아닌 상호호혜적인 사랑에 기반한다고 말하며 “내가 아이에게 받은 과분한 사랑, 계산 없이 돌격하는 순정에 나는 내 시간과 자유를 기꺼이 희생한다. 여기에 굳이 이름을 붙이라면 의리 정도가 적당하겠다”고 정의한다.(64쪽)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아이가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라는 사실을 은연히 감각하게 된다.
이 일과 저 일을 분리할 수 없는 여성들
많은 여성들이 돌봄과 직업 생활을 분리하려 애쓴다. 사회생활, 전문적인 직업 세계가 그 둘의 분리를 은연중에 촉구한다. 물론 남성에게도 그렇다. 그래서 돌봄이 한쪽에 전가되는 것을 남성 개개인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84쪽) 그러나 애써본 여성들은 알 것이다. 돈 버는 일과 돈이 벌리지 않는 집안일을 따로 분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자신을 소모하는 쪽이 돌봄이고 자신을 성장시키는 쪽이 사회일(직장을 비롯해 돈 버는 일)이라고 할 수도 없다. 모든 집안일은 반복적이지만 매번 다른 세심함과 능숙함을 필요로 하며, 돌봄은 절대 일방향적이지도 평면적이지도 않다. 돌봄은 상호작용이면서 입체적이다. 또한 돈 버는 일과 번 돈으로 살림을 꾸리는 일은 결코 수직적이지 않다. 저자는, 기존의 기업의 관성, 사회 시스템 속에서는 여성, 남성 모두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아이를 돌보는 엄마라는 정체성이 내가 맡은 일에 조금도 타격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 당시 내게 돌봄이란 회사에서의 내 브랜딩 요소에 가까웠는데 주말에 아이와 겪은 작고 귀여운 소동을 대화 중 풀어낸다거나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여성들과 고충을 함께 나눌 때 동원하는 식이었다. 주로 남성인 상대가 듣기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수위를 조절했고,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일터에 헌납하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위협하지는 않는다고 안심시켜야 했다. (...) 회사에서는 아이 챙기듯 의원을 모셨다. 집에 가면 의원에게 하듯 아이를 대했다”(87, 95쪽)는 저자의 고백은 두 일을 동시에 하는 여성들에겐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경험이다. 2막에서 저자는, ‘돈 버는 여성’이 어떤 다급하고 분열적인 처지에 놓여 있는지 살피고, 어떻게 하면 돌봄을 나눌 수 있는지를 묻고 고민한다.
답은 A와 B로 정해져 있고
여성은 함정에 빠진다
여성이 가정 내 역할 분담을 거론하면, 사실상 남성의 답은 두 가지로 정해져 있다. 이 진격이 불가능한 벽 앞에서 여성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그저 침묵이다.(99쪽)
답 A: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
답 B: 왜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어렵게 하려 들어?
질문: 애는 나 혼자 낳았어? 이 집은 당신 집 아니야? → A
질문: 당신도 한번 직접 해봐. 애 밥까지 챙겨줄 수 있어야 진짜 육아 분담이지. → B
질문: 아빠가 집안일을 잘해야 딸이 좋은 남자를 고를 줄 알게 된대. 어떻게 생각해? → A
질문: 나도 다시 일해야지. 애 보는 거 이제 진짜 나눠야 하지 않아? → B
괜한 지적을 해서 분란을 일으킨 것 같은 자책이 최후에 남는다. 그럼에도 분란을 일으키기로 작정하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변화의 실마리를 잡을 수조차 없다. 더욱이 저자가 맞닥뜨린 재난은 그 어떤 의문도 닫아버리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보호자 분’으로 살면 알게 되는
가족 너머의 문제들
간병과 돌봄의 최전선을 가족으로 두는 사회에서 저자는 이 문제가 얼마나 절실하게 ‘가족 너머의 영역’인지를 파고든다. 병원은 환자를 한 명의 개인이 아니라 한 종의 병으로 본다.(180쪽) 병의 원인 인자를 없애는 치료 과정에서 인간성은 소거되며, 저자의 딸아이는 ‘윤이’라는 이름을 잃고 ‘급성림프모구성백혈병’으로 화한다. 의사, 간호사, 전문 간병인이 병과 병을 갖게 된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것이 단순히 ‘친절’의 문제일까. 저자의 의혹은 끊이지 않는다.
“보호자 분”으로 의료 시스템 안에 머무는 동안 저자는 아이가 일반학교에 등교할 수 없는 상황에 좌절한다. 기본적으로 학교가 신체적 장애나 신경 다양성, 중증 및 만성 질환을 가진 아이를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병원 학교’에 입소해 또래 환자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연습을 계속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런 시설이 있는 병원에 아이를 입원시킬 수 있었던 ‘가족 자원’에 기반하고 있음도 깨닫는다.
저자의 생각은 입원실을 벗어나 늘지 않는 의대 정원, 의대 입시에 투자되는 엄청난 자원과 그것의 비효율성, 지역 공공의료원 폐쇄 문제 등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