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세계의 원형을 찾아서,
인쇄의 원형을 찾아서
불멸의 작가들이 빚어낸 작품세계의 원형 ‘노벨라’
‘노벨라(Novella)’는 중편소설을 이른다. 단편과 장편의 장점을 아우르는 양식으로 작가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원대한 세계의 서막을 여는 출발점이면서 그 축소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벨라는 작품의 질이나 의미보다는 단편에도 장편에도 속하지 않는 분량 때문에 상업 출판에서 소외되어 단편집이나 작품집의 구색을 맞추기 위한 작품으로 취급되어왔다. ‘노벨라33’은 이런 노벨라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이 선집은 문학사에 불멸의 이름으로 남은 작가 33인의 노벨라 33편을 전면에 내세운 혁신적인 시도이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부터 국내 초역인 작품까지 고루 선별하여 오늘의 새로운 언어로 해석해 선보인다. 이런 시도는 세계적으로 전례가 거의 없을뿐더러, 활판인쇄를 감행한 경우는 최초인 동시에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문장을 꾹꾹 눌러 새겨낸 ‘활판인쇄’
작품세계의 본질이 응축된 고전 노벨라를 이 작품들이 본래 인쇄되었던 방식이자 인쇄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방식인 ‘활판인쇄’로 새겼다. 인쇄(印刷)란 ‘잉크를 사용해 인쇄판의 글을 종이, 천 등에 박아내는 것’을 뜻한다. 활판인쇄는 활자가 볼록하게 새겨진 인쇄판을 종이 위에 직접 눌러서 잉크를 새겨 넣는 방식이다. 팔만대장경 이전부터 구텐베르크 성서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모든 기록물 인쇄를 담당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며 기술의 발전과 시대의 추이에 따라 오프셋인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이후, 사람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고 시간과 비용 또한 많이 소요되는 활판인쇄는 그 오랜 역사가 무색하게도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느리지만 깊숙하고 선명하게, 한 장 한 장 찍어낸 활판인쇄의 문장들은 꾹꾹 눌러쓴 손 글씨를 닮았다. 종이에 새겨진 활자의 획이 질감을 통해 그대로 느껴진다. 지난날 불멸의 작가들이 육필로 써 내려갔을 문장들을,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 다시금 구체적인 질감을 지닌 살아 있는 활자로 되살리고자 했다.
기획 의도: ‘되’새김과 ‘새로’ 새김
이 프로젝트의 첫 기획은 201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련의 고전 노벨라를 통해 되다 만 장편도, 넘치고 만 단편도 아닌 작가의 핵심 역량이 응축된 노벨라만이 가진 독보적인 경지를 소개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역설적으로 종이책이 한계를 드러낸 지금이야말로 종이책 시장에서 상업성 때문에 외면받은 노벨라를 재조명할 시점이라고도 판단했다. 이와 동시에 효율성과 경제성에 밀려 상업 출판에서는 사장되었지만 인쇄의 본질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활판인쇄를 통해 출판의 본질과 의미를 반추하고자 했다. ‘더욱 많이, 더욱 빠르게, 더욱 싸게’라는 모토가 곧 발전을 의미하는 현대 관점에서 보면 흐름에 뒤처지는 것일 수 있지만, 출판은 우리가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을 ‘되’새기는 동시에 ‘새로’ 새기는 작업임을 믿기 때문이다. 후대에 전할 가치가 있는 문자로 이루어진 내용물을 짜임새 있게 꿰어 종이 위에 찍어 새기고, 물성을 가진 책으로 오래도록 보존하고 남기는 것이 출판의 책무라고 믿기 때문이다.
편집: 출판의 속살
작품 선정
2022년 봄 내부 편집진과 기획위원 역할까지 겸해주신 번역자가 따로 또 같이 여러 회의를 거치며 세계적으로 검증을 마친 수백 편의 노벨라 중 언어권별 대표 작가와 이번 선집에서 소개하고 싶은 작가, 대표적인 노벨라 작품 등 여러 갈래의 목록을 정리하고 추려나가 33인 작가의 33개의 작품을 선정했다. 더 다양하고 낯선 작품을 함께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노벨라에 해당하는 작품을 쓰지 않은 작가도 있고 ‘노벨라 대표 선집’을 만들 때 제하기 어려운 작가들이 워낙 많았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선정을 마무리했다.
원고 편집
작품 선정을 진행하는 동시에 번역자와 편집자 섭외에 들어갔다. 2023년 말 출간을 목표로 15개월 안에 33개의 번역 원고를 받고 편집까지 해내야 했다. 29명의 번역자와 12명의 편집자가 힘을 보탠 대장정이었다. 번역자, 담당 편집자와 논의하며 최대한 각 작품의 원문을 존중하면서도 선집의 일관된 원칙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작품마다 작가 연보를 달고 필요한 경우에는 해설을 수록해서 작품 이해를 돕고자 했다.
편집 디자인
2022년 하반기에는 본격적으로 원고가 입고되기 전에 디자인과 제작 과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활판인쇄에만 6개월이 걸려 여느 때처럼 편집을 모두 마친 뒤 순차적으로 제작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편집, 디자인, 제작의 전 공정이 동시에 맞물려 돌아가야 했다. 일정 면에서도 그랬지만, 지금까지 편집해온 그 어떤 책보다도 제작과의 연결 고리를 거듭 떠올리며 작업하는 게 중요했다. 무엇보다 활판인쇄를 통해 만들어질 책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우선 활판인쇄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방안을 고민했다. 활판인쇄의 한계도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예를 들어 본문의 판면은 수지판 규격에 맞춰 설정했다. 먼저 본문 디자인을 잡고, 활판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이 담긴 서체를 선정하고, 적절한 본문 용지를 결정했다. 실제 활판으로 인쇄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아보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종이에 여러 종류의 서체로 디자인한 원고를 시험 인쇄해보았다. 물성이 중요한 책이기에 눈으로 직접 보고 만져보는 과정이 필요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우리 머릿속에 있는 어떤 것이 실현 가능하고, 어떤 식으로 구현될지는 현장에서 논의하며 결정해야 했다.
노벨라 선집의 느낌을 잘 담아낸 서체도 우여곡절 끝에 정했다. 현대 서체는 가로 읽기에 맞추어 높낮이의 변화를 줄이고 자음의 너비를 넓히고 한 글자에 해당하는 공간의 여백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변화해왔는데, 옛 활자의 느낌이 살아 있으면서도 여백이 많아 여유가 느껴지고 가독성에도 문제가 없는 서체를 택했다. 또한 활판인쇄에서 마침표, 쉼표, 따옴표 등의 기호는 과거에 활자를 하나하나 골라 판에 짜던 시절 별개로 반각을 차지해 지금의 인쇄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백이 컸는데, 이러한 느낌을 살리고자 기호에는 여백을 따로 설정했다.
표지 디자인은 노벨라의 원문을 우리말로 고스란히 되살린다는 의미를 담아 공간을 반으로 가르고 원어와 우리말을 동등하게 배치했다. 표지 활자도 컴퓨터 서체를 그대로 쓴 것이 아니라 실제 크기로 한 차례 활판인쇄한 뒤 그것을 스캔하여 다시 다듬어 앉히는 과정을 거쳤다. 굴곡 없이 잘 빠진 느낌보다 일정치 않고 투박한 느낌이 살았으면 했다. 앞표지 중앙에는 두 공간을 가로지르는 작가의 서명을 배치했다. 서명이 아닌 도장을 써온 동양 문화권의 서명은 서예 작품이나 육필 편지 등에서 따왔다. 마지막으로 뒤표지에는 다른 어떠한 부연도 없이 책의 주민등록번호 격인 ISBN 번호와 바코드, 만년필과 잉크의 이미지만을 남겨서 작가의 피와도 같은 문장들이 저마다 다른, 결코 중복되는 법 없는 바코드처럼 새겨졌다는 느낌을 담았다.
제작: 영원히 남을 책을 향하여
활판인쇄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동판 활판인쇄는 활자가 너무 굵고 무딘 점을 감안해, 더욱 예리하게 인쇄할 수 있는 수지 활판인쇄를 선택했다. 하나하나의 활자를 따로 조판하는 방식이 아닌 팔만대장경과 같이 인쇄판에 전체 활자를 조판하는 방식이다. 기본 서체는 활판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가독성을 고려한 순바탕체로 결정했다. 인쇄기는 파주활판공방에 남아 있는 백 년 이상 된 반자동과 수동 활판인쇄기 두 대를 활용했다. 수지판 제작과 인쇄는 권용국(89), 김평진(74) 두 장인이 시종일관 손수 진행했다. 6개월에 걸쳐 6,000개에 이르는 수지판을 제작하고, 이를 기반으로 엄격한 검수를 통해 필요한 부분은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