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현실이든 환상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이 순간을 믿는 거예요.” 불가해한 삶 속에서 밀려나고, 상실하고, 흔들리는 가운데 환상에 기대어 일어서는 이야기 『당신의 계절이 지나가면』, 『여름의 한 가운데』, 『달이 뜨는 동쪽, 세상의 끝』으로 평범한 일상의 미묘한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던 소설가 주얼의 신작 『당신의 판타지아』가 출간되었다. 6편의 소설을 묶어낸 이번 소설집은 전작과 달리 환상적 요소를 차용해 현실이 아니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우리 사회의 면면을 비춘다. 특히 처음과 마지막에 실린 두 편의 소설(「당신의 판타지아」, 「순간을 믿어요」)은 각각 개별적인 주제를 담은 독립적인 소설로 존재하면서도, 같은 인물과 배경을 공유하는 연작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 작가로 등장하는 주인공 ‘나’의 과거와 현재는 두 소설 안에서 연결되어 펼쳐지며, 두 소설 사이에 수록된 네 편의 소설은 주인공 ‘나’가 ‘소설 안에서 쓴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주류의 세계에 편입되지 못하고 밀려난 사람들 『당신의 판타지아』 속 인물들은 선 밖으로 밀려나 있다. 그들이 딛고 선 땅은 허공이고, 따라서 매달릴 곳이 필요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 발견한 곳에 밧줄을 건다. 할 수 있는 만큼 단단한 매듭을 짓고 버틴다. 견딘다. 선이 새롭게 다시 그어지거나, 자신이 선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그래서 몸에 묶인 밧줄을 풀고 두 발로 편안히 땅을 밟을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의 판타지아」에서 ‘나’의 소설에 조언과 응원을 아끼지 않는 친구 ‘K’는 어릴 적 각종 백일장에서 1등을 놓친 적 없는 수재였다. 당연하다는 듯 국문과에 진학하고 작가를 꿈꾸지만, 삶은 그를 문학에서 멀찍이 떨어뜨려 놓는다. 되려 ‘나’가 예기치 않게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여러 권의 책을 낸 작가가 된다. 이제 ‘나’에게 소설은 삶의 일부가 되었지만, 반면 ‘K’의 삶에서 소설은 저만치 멀어져 있다. ‘K’는 술에 자신을 묶고 생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버둥거린다. 「경수의 다림질」 속 ‘경수’와 ‘나’는 “더 나아질 가능성”을 찾아 지방에서 서울로 온 취업준비생이다. 대기업 입사를 희망하지만, 학력도 스펙도 변변찮다. 그들에게 한 뼘 햇볕은 자연이 주는 선물이 아니라, 즉각적인 ‘비용’이고 ‘지출’이다. 동거를 택하는 두 사람의 결정 뒤에는 ‘사랑’보다 ‘주거비용 절감’이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더 크게 자리하고, 따라서 사랑이 끝나도 동거는 끝나지 않는다. 그밖에도 타인과는 다른 방식의 시력을 새로 얻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시각장애인 ‘현오’(「키클롭스」), 비인간 동물이라는 이유로 무분별한 폭력에 노출되는 무수한 존재들(「이상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그리고 어릴 적 끔찍했던 기억과 가족과의 갈등 때문에 집안의 청결과 아기에 집착하는 ‘유선’(「곰팡이」)의 세계 등이 차례대로 펼쳐진다. 환상으로 현실을 말하기 이 책의 뼈대를 이루는 두 편의 소설 「당신의 판타지아」와 「순간을 믿어요」의 ‘나’는 취미로 글쓰기 모임에 나가 소설을 쓰다가 독립출판을 하고, 뒤이어 연달아 몇 권의 책을 내면서 소설가가 되는 인물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듯, 한 사람의 소설가가 태어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나’를 삶의 다음 장으로 넘어가게 하는 인물 ‘K’와 ‘유이’는 현실과 환상을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무엇이 현실이고 환상인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을 것인지 질문하고 택하게 한다. 이 소설에서 환상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당신의 판타지아」와 「경수의 다림질」에서는 유령의 모습으로, 「키클롭스」에서는 손바닥에 생긴 눈으로, 「이상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에서는 말하는 고양이로, 「곰팡이」에서는 꿈속의 무의식과 온 집안을 뒤덮은 곰팡이로 펼쳐진다. 환상의 사전적 정의는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보이는 현상’,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생각’이다. 그러나 불가해한 삶 속에서는 사실이 아닌 것이 때로 사실이 되며,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생각 또한 현실이 되기도 한다. 그런 현실은 환상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소설에서 환상은 언어의 빈 곳을 메우는 장치가 된다. 소설 안의 소설 이 책의 중간에 실린 네 편의 소설(「경수의 다림질」, 「키클롭스」, 「이상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곰팡이」)은 처음과 끝에 실린 소설의 액자소설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당신의 판타지아」와 「순간을 믿어요」 속의 소설가 ‘나’가 쓴 소설이 바로 그 네 편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소설 안의 소설은 ‘계속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하던 ‘나’가 창조한 세계로 읽을 수도 있고, 완전히 독립적인 하나의 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전자의 방식으로 읽기를 택한다면 독자 스스로가 또 다른 ‘K’가 된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생을 붙들고, 이야기의 다음 페이지, 삶의 다음 페이지를 펼치고 싶어질 것이다. 후자의 방식으로 읽는다면, 환상을 통해 선명해지는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주얼 작가는 환상을 통해 죽음을 애도하고, 상실을 어루만진다. 정상성에 기반한 경계짓기와 구별하기가 어떻게 한 개인을 파괴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인간만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얼마나 철저히 자기만의 세계에 스스로를 가둔 채 살아가고 있는지 날카롭게 드러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환상이 가진 최고의 미덕은 각자의 건조한 삶에 물기를 부여하는 것임을 잊지 않는다. 현실이든 환상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믿는 것이다. 깊고 단단하게 믿는다면 그건 분명, 선명한 나의 이야기가 된다. _「당신의 판타지아」 36쪽 누구에게나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있고, 현실의 간극 속에서 피어나는 환상이 있다. 소설은 말한다. 현실이든 환상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중요한 건 믿는 거라고. 그렇게 믿음을 다져갈 때, 이야기는 완전하고 확실하게 나의 것이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