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야청빛 저녁의 시간,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감성의 심오한 원천을 탐색하며 현대 프랑스 미학의 지도를 그린다 이 책은 지은이가 이화여대 서양화과와 철학과, 서울대 미학과에서 했던 강의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이 책의 제목은 랭보의 시 「감각」에 나오는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랭보는 시에서 여름 야청빛 저녁 들판의 한복판에 서서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촉감으로 충만하게 차오르는 삶의 기쁨을 찬양하고, 오직 그러한 자연 안에서만 가능한 어떤 것으로서, 저멀리 사랑을 찾아 떠나겠다는 기대와 결심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랭보를 따라 신체의 모드가 전환되는 듯한 시간, 말과 생각의 스위치를 내리고 감각기관만 조용히 열어두고 싶은 욕구가 찾아오는 시간, 바로 ‘야청빛 저녁’의 시간에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감성의 심오한 원천을 탐색하며 철학과 예술에 대해 사유한다. 이 책은 현대 프랑스 미학의 다양한 이론을 특정한 관점하에 소개하고 배치한다. 그 관점이란 18세기 말에 이미지와 개념 사이에 간극이 발생하면서 근대 미학이 시작되었으며, 이 간극이 점점 더 벌어지는 가운데 20세기 현대 프랑스 미학은 그것에 대한 사유와 대답으로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 푸코, 메를로퐁티, 리오타르, 보드리야르, 들뢰즈, 랑시에르는 이미지와 개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지, 더 나아가 예술과 철학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해 각자 고유하고도 독특한 입장을 취해 사유를 밀고 나아갔다. 이 책은 현대 프랑스 미학의 개별적인 이론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지도를 그려 보임으로써 예술과 철학의 주요 주제들에 대해 독자들이 보다 폭넓은 시각으로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푸코에서 랑시에르까지, 이미지와 개념 사이의 공간에서 펼쳐진 다양한 현대 미학 사상 이미지와 개념의 유희가 모더니티의 공간을 형성한다고 할 때 이는 칸트의 미학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라는 정식으로 나타나는 칸트의 미학을 통해 18세기에 아름다움이라는 이름하에 이미지와 개념이 유희하는 공간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그후 여섯 명의 현대 프랑스 철학자가 이 공간 안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차례로 찾아가며 각각의 철학자와 한 미술가를 짝짓는 방식으로 그들의 미학을 관련 도판과 함께 살펴본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사유와 미술의 짝은 푸코와 마그리트, 메를로퐁티와 세잔, 리오타르와 뒤샹, 보드리야르와 앤디 워홀, 들뢰즈와 프랜시스 베이컨, 리오타르와 바넷 뉴먼, 끝으로 자크 랑시에르와 주노 루도비시이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이미지와 개념 사이의 공간이 어떻게 칸트의 미론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며, 현대 프랑스 미학의 여러 이론이 어떻게 이 공간 안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본다. 푸코는 마그리트와 함께 이미지와 개념의 매듭들이 풀려 있는 광경을 주제적으로 다루었고, 이후 메를로퐁티의 세잔과 리오타르의 뒤샹은 이미지와 개념의 양극단에서 현대 미술의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즉 이들은 정반대 지점에서 각각 순수한 이미지가 스스로 나타나게 만드는 시선(메를로퐁티와 세잔), 그리고 개념이 이미지를 변신시키는 과정(리오타르와 뒤샹)에 현대 미술의 동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보드리야르는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이미지와 개념 사이의 관계 없음, 곧 니힐리즘을 보았다. 하지만 이것을 감추려는 예술의 제도, 그리고 이것 자체를 주제로 삼는 예술의 반어적인 자기 고백을 또한 고발했다. 현대 예술은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화제의 중심으로 삼지만, 이 때문에 사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가지고 무한 증식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론은 예술이라는 공모에 대한 가장 냉소적인 비판이다. 이 책의 2부에서는 이미지와 개념 사이의 관계가 칸트의 숭고론에서 어떻게 나타났으며, 자신들의 사상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요소를 칸트의 숭고론에서 발견한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 이미지가 개념을 압도하고 주어진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을 어떻게 자신들의 이론 안에 수용하는지를 살펴본다. 들뢰즈에게 예술은 힘을 포착하는 것이고, 이때 감각은 개념을 초과하며 새로운 사유를 촉발한다. 이런 점에서 감각은 모든 사유의 출발점이며 적극적인 창조의 시작점이다. 반면 리오타르는 교환, 합의, 의사소통, 사실성 같은 규범을 발생시키는 개념과 권력의 협력을 비판한다. 예술의 역할은 그 바깥에서 쉽게 통약 가능하지 않은 어떤 것을 증언하는 것이며, ‘지금’ 사건 자체의 발생을 상기시키면서 새로운 규칙의 미래가 가능하다는 점을 일깨우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미학의 의미를 제작과 감상이 미리 전제된 코드 없이 각자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 속에서 발견한다. 심미적 혁명이란 능동과 수동, 형식과 감각, 단일성과 다양성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상황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정치적 영역에서 프랑스혁명과 함께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단절과 감성적 단절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도 지속되지 않는다. 현대 미학의 기초를 놓은 철학자들의 사유를 통해 보는 철학과 예술의 가치와 역할 이 책에서 다루는 철학자들의 사유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미술 이론과 전시 곳곳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현대 미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사유를 통해 예술과 철학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일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 철학과 예술이 오늘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좀 더 큰 시야에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철학, 미학에 관심 있는 독자 및 학생, 연구자, 미술계와 예술계, 문학계 종사자 등 폭넓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미학 이론을 그들이 직접 언급한 서양의 미술작가들과 연관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 장의 마지막에 그와 관련해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국내 미술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함으로써 미학 이론들이 오늘날 한국의 맥락에서 어떻게 연장되고 갱신되고 있는지 함께 보여준다. 여기에서 소개하는 작가들은 안규철, 오인환, 홍순명 작가처럼 이미 미술계에서 확고한 평가를 받은 중견작가들, 노상호, 지희킴, 이근민 작가처럼 새로운 세대의 감각을 담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신진작가들, 강유정, 김그림 작가처럼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청년 작가들로 다양하다. 현대 프랑스 미학의 지도에 따라 큐레이팅된 이 책의 작은 “상상의 미술관”을 통해 독자들도 각자의 상상의 미술관을 지어나가는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