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이후의 소설들은 불행히도 거기서 십 년간 멈췄다.
그 결과 우리는 한국 문학의 어떤 ‘전조’를 십 년간 잃었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_황현경(문학평론가)
한국 문학이 잃어버린 어떤 ‘전조’
백민석의 두 번째 소설집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개정판 출간
작가들이 기다린 작가가 있다. 10년 만에 문단에 다시 돌아와 그저 무덤덤하다고 말한 작가가 있다. 단 한 개의 문학상도 받지 못했지만 그 어떤 문학상 수상 작가보다 더 독보적인 글을 쓴 작가가 있다. 해설을 쓴 평론가 황현경은 그를 두고 “한국 문학이 잃어버린 어떤 ‘전조’”라고 말했다. 바로, 소설가 백민석이다. 물론, ‘백민석이 돌아왔다’는 건 더 이상 기사거리가 아니다. 소설 좀 본다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백민석이 돌아오고 나서도 헌책방을 기웃거리며 계속해서 ‘백민석들’을 기다려야 했다. 백민석들 즉, 그의 절판된 책들이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1990년대 한국 문학의 뉴웨이브를 이끌며 새 문을 열었던 백민석은 지난 소설이 아닌 지금의 소설로 다시 독자들에게 다가서려 한다. 해설을 쓴 황현경 평론가는 “《헤이, 우리 소풍 간다》(문학과지성사, 1995)에서 《목화밭 엽기전》(문학동네, 2000)에 이르는 작품들에 대한 해석은 일찌감치 기각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작가 자신도 돌아와 쓴 첫 소설에서 “이제 모든 것은 다시 씌어져야 한다.”(〈혀끝의 남자〉)고 말했다. 그러니 이제 그의 모든 소설은 독자들에 의해서 다시 읽혀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펴내는 그의 두 번째 소설집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이 그 첫 걸음을 내딛게 할 것이다. 한겨레출판에서는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이후에도 《목화밭 엽기전》, 《내가 사랑한 캔디》, 《불쌍한 꼬마 한스》의 개정판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
“내 가난은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의 가난이 아니다.
내가 겪은 가난은 누구는 가난했고 누구는 가난하지 않던, 그런 시절의 가난이다.”
옛 소설을 가져와 옛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과거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니까”라거나 “우리의 과거는 과거도 아니다”(〈아주 작은 한 구멍〉)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표제작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에서 십구 년 만에 장원을 다시 찾은 ‘나’가 그렇듯이 다시 찾아야 할 곳이기에 찾았고, 다시 읽어야 할 소설이기에 다시 나왔을 뿐이다.
백민석은 우리의 ‘구멍’이었다.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은 한국 문학에 있어서 “아주 커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구멍”(〈아주 작은 한 구멍〉)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구멍이 없는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백민석이 없는 한국 문학은 한국 문학이 아니었는지도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이 없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평론가 황현경은 해설에서 ‘구멍’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가령 도넛의 뚫린 한가운데처럼, 존재 그 자체의 숙명인 결여, 곧 구멍. 일찍이 하루키가 제기한 “도넛의 구멍을 공백으로 받아들이느냐, 존재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양을 쫓는 모험(羊をめぐる冒險)》, 1982)를 떠올리며 답해보자면, 구멍이 없는 도넛은 도넛이 아니듯 결여가 없는 존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구멍을 가지고 살아가듯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의 인물들 또한 모두 구멍을 가진 채 살아간다. 자신의 스무 평짜리 아파트에 초원을 키우며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거나(〈검은 초원의 한편〉), 다른 사람의 걸음걸이를 베끼고 표정을 베끼고 문장을 베끼거나(〈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스스로가 스스로를 도와야 했기에 겁에 질린 채 사고 한 번 치지 않고 자라거나(〈이 친구를 보라〉), 저도 모르는 사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는 잠들고(〈구름들의 정류장〉), 인형 뽑기 기계에 정신없이 동전을 쏟아 넣고 버튼을 눌러대거나(〈인형의 조건〉), 홀로 남겨진 빈 사무실에서 홀로 해바라기가 그려진 실크 넥타이에 스스로를 목매달거나(〈아주 작은 한 구멍〉), 발목이 잘린 채 밋밋하고 물렁물렁하고 고분고분한 무엇이 되거나(〈이렇게 정원 딸린 저택〉), 길을 걷다가 과거의 거리로 가게 되거나(〈진창 늪의 극장〉), 모두 저마다의 엉덩이에 시커먼 얼룩이라는 구멍 하나씩을 묻힌 채 살아간다. 구멍은 “나 자신”이기도 “내 생활”(〈아주 작은 한 구멍〉)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늘 나 자신을 택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내 생활을 택한다. 우리는 구멍을 채우는 대신 목구멍을 채우고 만다. 서로의 구멍을 바라보는 대신 서로의 목구멍을 바라보고 만다. 백민석이 없는 10여 년을 그랬듯이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이 절판된 몇 년여를 그랬듯이. 우리가 어떤 ‘전조’를 잃어버려야만 했다면 아마 이게 이유가 아닐까.
여전히 문제이고, 계속해서 문제일 소설
백민석이 돌아왔고,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이 돌아왔다. 우리는 비로소 한국 문학이 잃어버렸던 어떤 ‘전조’를 읽어낼 시간을 갖게 됐다.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다. 늘 실험과 전위, 그리고 사유에 의해 쓰였던 그의 소설은 변함없이 지금의 한국 사회와 한국 문학의 구멍을, 커다랗고 시커먼 구멍을 제대로 바라보려 할 것이다. 시커먼 얼룩이 묻은 바지를 벗고 우리에게 ‘날엉덩이’를 들이밀 것이다. 작가는 그런 마음을 개정판 작가 후기를 쓰며 첫 책의 작가 후기에서 삭제한 문장을 도로 꺼내옴으로써 드러냈다.
“나는 문학이 이 사회의 진화에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지간해선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학이 사회에 해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은 더 이상 문제적이지 않다. 그저 여전히 문제이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문제로 남을 것이다. 더 이상 답은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