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형상들

자크 랑시에르
1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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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월, 조르주퐁피두센터에서는 '역사에 직면해서(1933~1996)'라는 주제의 전시회가 열렸다. 즉 1933년부터 1996년까지 60여 년간 양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헝가리 혁명, 베트남전, 사회주의의 몰락 등 여러 역사적 사건에 직면했던 예술가들을 한데 불러모은 것으로, 당시 전시회 카탈로그를 위해 쓰인 글을 묶어낸 책이다. <역사의 형상들>은 그로부터 16년 뒤인 2012년에 출간되었다. 1990년에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를, 1995년에 <불화>를 발표한 랑시에르는 사유의 방향을 조금 틀어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이 책에 실린 두 글, <잊을 수 없는 것들>과 <역사의 의미와 형상들>은 그 전환점에 놓여 있는 텍스트이자 또한 역사로도 읽히고 이야기로도 읽히는 histoire의 중의성을 영화.사진.회화 등의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본 텍스트이기도 하다. 바꿔 말해 <역사의 형상들>은 역사의 이름들을 불러오며, 이미지의 운명을 언급하면서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다루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 놓인 텍스트다. 짧고 압축적인 이 글들에서 그는 그가 지속적으로 주제 삼고 있는 역사.정치.미학의 불가분한 관계를 우리 시대 발명품인 영화나 사진 이미지들, 혹은 그 자신의 역사를 가진 회화 이미지들의 '표상의 힘'을 통해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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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잊을 수 없는 것들 1. 카메라 렌즈 뒤에서 2. 창문 뒤에서 3. 가시성의 문턱 4. 소멸에 직면해서 역사의 의미와 형상들 1. 역사의 네 가지 의미 2. 역사와 표상: 근대성의 세 가지 시학 3. 역사화歷史畫의 세 가지 형식 옮긴이의 말 인용된 영화들

Description

역사에 직면한 이미지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역사화歷史畫의 전도와 역사화歷史化의 흐름 속에서 세계대전을, 수용소의 기억을, 기억의 질서에서 배제된 자들을, 말 없는 자들을, 이미지는 어떻게 형상화하는가 책 소개 1996년 12월, 조르주퐁피두센터에서는 ‘역사에 직면해서(1933~1996)’라는 주제의 전시회가 열렸다. 즉 1933년부터 1996년까지 60여 년간 양차 세계대전을 비롯해 헝가리 혁명, 베트남전, 사회주의의 몰락 등 여러 역사적 사건에 직면했던 예술가들을 한데 불러모은 것으로, 이 책은 당시 전시회 카탈로그를 위해 쓰인 글을 묶어낸 것이다. 시차는 상당하다. 전시회가 1996년에 있었고, 이 책 『역사의 형상들』은 그로부터 16년 뒤인 2012년에 출간됐다. 그러나 이 숫자들은 일견 의미심장해 보인다. 1990년에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를, 1995년에 『불화』를 발표한 랑시에르는 사유의 방향을 조금 틀어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2000년에 출간된 『감각적인 것의 나눔』, 2003년에 출간된 『이미지의 운명』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에 실린 두 글, 「잊을 수 없는 것들」과 「역사의 의미와 형상들」은 그 전환점에 놓여 있는 텍스트이자 또한 『역사의 이름들』(1993)에서의 작업, 즉 역사로도 읽히고 이야기로도 읽히는 histoire의 중의성을 영화·사진·회화 등의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본 텍스트이기도 하다. 바꿔 말해 『역사의 형상들』은 역사의 이름들을 불러오며, 이미지의 운명을 언급하면서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다루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 놓인 텍스트다. 우리는 여기서 랑시에르 저작들의 여러 지점을 꿰어나가는 한 형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역사 앞에 선 예술이 마주한 시련을 알고 있지 않은가. 아도르노의 그 유명한 문장,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그런 일이 있었다. 끔찍한 일, 도무지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여기서 예술을, 아름다움을 말하는 게 가능한가? 그것은 “표상될 수”도, “형상화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부당하지 않은가? 랑시에르에 따르면, 그 결론은 허위다. 진실은 그 반대다. 아우슈비츠 이후 오직 예술만이 아우슈비츠를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이미 알랭 레네는 수용소 문이 열렸을 때 생존자와 시체를 찍은 사진들에서 장소들의 침묵과 주변 자연의 무관심을 대조시켰다(「밤과 안개」). 클로드 랑즈만은 모든 기록 자료를 배제하면서, 어떤 끔찍한 광경도 표상하지 않으면서, 그때 그 사람들, 그러나 그때와 정확히 같지 않은 인물들에게 그때 그 행동을 재연해달라고 청하지 않았던가?(「쇼아」) 고야는 자신의 데생들 중 하나에 ‘우리는 볼 수 없다’고 썼다. 그렇지만 그가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백지, 아무도 볼 수 없는 무언가를 그렸던가? 그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광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보기를 허락하지 않는 것을 보고 또 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림의 고유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로 회화는 더 이상,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꽃들을, 비스듬히 누워 있는 나체들을, 혹은 첼로 연주자들을 그릴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의 미국적 무질서에 동의하는 순수한 형식놀이에 무의미하게 전념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에 직면한 이미지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이어지는 것은 일련의 미술작품들이다. 여기 <총살당한 자>(장 포트리에)를 보라. 도무지 어떤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마치 두꺼운 반죽과도 같은 형상을 보라. 바넷 뉴먼의 색과 면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오토 딕스의 형상 파괴를, 키리코의 마네킹 같은 형상들을, 혹은 1968년 미스 아메리카의 초상과 베트남 포로를 찍은 스냅사진을 결합한 <미스 아메리카>(볼프 포스텔)를 보라……. 짧고 압축적인 이 글들에서 그는 그가 지속적으로 주제 삼고 있는 역사·정치·미학의 불가분한 관계를 우리 시대 발명품인 영화나 사진 이미지들, 혹은 그 자신의 역사를 가진 회화 이미지들의 ‘표상의 힘’을 통해 질문한다. 즉 예술이 한 시대를 관통한 사건들을 어떻게 형상화하는지, 또 그것이 역사와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반성하며, 이미지들이 역사 안에서 역사를 만들며 감각적인 것을 나누는 방식들을 질문한다. 그 방식들은 여기서 구체적으로 영화와 회화의 고유한 역사를 형성한다. 여기서 ‘의’는 소유격만이 아니라 주격으로도 읽혀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방식들은 우리가 지나온 영화와 회화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더 이상 표상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현실을 마주쳤을 때,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들이 발명하는 새로운 역사의 형성과정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이 방식들은 다름 아닌 시간 속에서 역사 그 자체가 취하는 형상들이다. 그런데 예술가들이 감각적인 세계의 요소들을 분리하거나 다시 분배하기 위해 그 세계를 자르는 방식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모든 예술적 작업의 한가운데서 정치에 대해 질문하는 것일 뿐 아니라 예술의 ‘역사’ 그 자체, 역사라는 ‘말들’의 역사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이는 랑시에르가 이 책과 다른 책에서 계속해온 작업이다. 랑시에르에게, 이미지가 역사l’histoire를 쓰지 않고서는 이야기une histoire를 쓸 수 없다면, “어떤 장소 혹은 어떤 순간에 자신을 드러내거나 감추면서 말하지 않는 이미지가 없는 것처럼, 공식적인 역사가 영원히 고정한 이미지들을 다르게 드러내거나 감추면서 그것들에 대한 논의를 다시 열 수 없는 이미지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표상하는 행위는 물론 우리를 고정된 역사 안에 가둘 수도 있지만, 동시에 역사의 의미를 해방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 랑시에르가 책 전체를 통해 제기하는 질문―이미지는 무엇을 생각하는가?―이 놓인다. 이미지는 어떻게 역사 안에 자리가 없는 자들, 말이 없는 자들, 심지어 우리가 사라지게 한 자들을 보고 듣게 할 수 있는가? 이 무화/가시화에 대한 랑시에르의 질문은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의 불가능성에 대한 현대 철학자들의 질문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 표상 불가능성이 바로 예술의 의무다. 오직 예술만이 키리코의 공식―인간 안에 인간의 부재―을 따라 “비인간적인 것을 미美의 비인간성을 통해 감각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렇듯 역사의 이미지들 안에서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결국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나눔을 문제 삼고 다시 연출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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