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신문 기사만으로 생생한 역사 속 현장을 넘나든다!
1945년 8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부터 3국 외상회담의 진실과 신탁통치 찬반 논쟁 … 좌우익이 따로 거행하던 3?1절 기념식 … 비극의 4?3제주 사건 … 암운에 싸인 38선 … 흉탄에 쓰러진 김구 … 한국전쟁 발발부터 휴전협정까지 …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사형 … 4?19학생 의거 … 이기붕 일가 자살과 이승만 망명 … 1960년 6월 내각책임제 개헌 공포까지 당대의 하루하루 역사를 읽어냈다.
총 20종의 신문에서 찾아낸 기사 121건, 각 신문 영인본과 함께 원문을 따로 싣고 해설을 덧붙였다. 사건은 모두 58건, 이를 53건의 대항목과 5건의 중항목으로 분류했다. 이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의 시간 흐름을 보여 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서로 연관된 기사를 시기나 신문 종류에 관계없이 한데 모았음을 말한다.
신문 기사만으로 파란만장했던 근현대사의 속살을 들여다본다!
치열했던 해방 정국과 미군정하, 이승만 정권하의 역사를 양쪽의 시선으로 훑는다. 좌익지와 우익지가 선명하게 구분되던 시대, 좌익지인 조선인민보, 해방일보, 자유신문, 중앙신문, 노력인민과 함께 대표적인 우익지인 한성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도를 표방한 신조선보와 좌우 눈치 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경향신문, 대표적인 지방지인 민주중보, 부산일보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조와 색깔을 지닌 신문들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담았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해방 직후부터 1960년에 이르기까지는 신문들이 애써 ‘중립’을 지키려던 시절이 아니다. 야당지와 여당지가 분명히 갈리고 특히 해방 직후에는 좌익지와 우익지가 선명히 구분되던 시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에 입각해서 같은 사건을 정반대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악의적인 왜곡이나 고의적인 사실의 누락도 동반되었다. 가능하면 그런 점들을 해설에서 설명하려 했다.” _여는 글 중에서
해방직후사 전공 사학자의 깊이 있는 해설!
현대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던 소장 역사학자 고지훈이 해설을 맡았다. 분단과 전쟁, 첫 정권이 세워지고 의거로 인해 무너지는 복잡다단했던 전후 상황을 얘기하면서 맛깔스러운 글 솜씨와 유머 감각, 뼈아픈 통찰력으로 역사적 맥락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이승만보다 늦게 도착한 임정 요인들의 귀환을 전하는 기사 역시 약간의 과장이 눈에 띤다. 물론 광복군을 조직했고, 그 중 일부가 미군과 함께 작전을 펼치기도 했지만, 27년이라는 기나긴 임정의 역사를 감안한다면 경력이 좀 약해 보인다. 그것이 임정의 결정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3?1운동 직후 수립된 유일한 망명정부인데도,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독립투쟁의 경력이 무어냐며 좌익들이 걸핏하면 시비를 걸어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우리 한국인들의 인심은 후하다. 빛이 바래긴 했지만 기미독립운동의 추억을 간직한 임시정부의 간판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_22쪽
“한국전쟁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기도 하는 ‘1949년 국경 분쟁’의 몇 가지 장면을 보여주는 기사들이다. 38선은 1945년 8월 10일 밤에서 11일 새벽 사이, “가능한 북쪽”으로 설정할 것을 주문한 미 국무부의 주장에 따라, 본 스틸과 딘 러스크라는 두 대령에 의해서 고안되었다. 소련과 미국의 작전 구역을 분할하기 위해, 엉성한 지도 위에 그어진 이 경계선은 미소가 점령을 개시한 첫해부터 불확실한 경계로 인해 분란의 소지가 많았다.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에는 지피에스GPS도 구글 어스도 없던 시절이라는 점이다.
미소 양군이 사용하던 한국 지도는 모두 일본군이 작성한 것을 토대로 했지만, 제작 연도가 달라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중략) 1949년 가을까지 격렬할 때는 쌍방의 희생자가 500명이 넘을 정도로, 사실상 “작은 규모의 전쟁”으로까지 확장되었던 ‘국경 분쟁’의 원인에는 이 같은 ‘측량상의 문제’가 있었다. 물론 이 같은 기술적인 문제를 죽고 죽이는 분쟁으로 승화시킨 것은 전적으로 정치였다.” _101쪽
“중국은 유엔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유엔군의 38선 침범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던 차였다. 결국 걱정 많던 트루먼에게 중공군 참전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맥아더는 중공이 전면 개입함으로써 체면을 구겼다. 전쟁 범위가 다시 한 번 확대되었다. 맥아더의 설명처럼 압록강 저편의 보급 창고에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군대와 군수품들은 유엔의 작전 구역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전쟁은 도박. 맥아더는 떡 본 김에 제사지내기로 했다. 이미 참전 국가가 전 세계로 확대된 이상 전선을 한반도로 국한할 필요가 뭐 있으랴? 1951년 초, 바야흐로 인류는 제3차 세계대전의 입구에 다다르게 되었다. 확전이냐, 휴전이냐? 이 싸움은 맥아더와 트루먼의 기 싸움이기도 했다.”_145쪽
“우리 현대사에서 발생한 비극의 대부분은 ‘불의의’ 혹은 ‘예기치 못한’, 그런 의미에서 전혀 막을 수 없는 재앙과는 거리가 멀었다. 4대 정?부통령 선거일 아침 내 집 앞에 배달된 신문 기사의 첫머리가 “향후 4년을 가늠할 대망의 하루 어쩌고…”하는 내용이 아니라 “사상 최대의 비극이 예상되는”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를 짐작치 못하는 것은 이승만을 비롯한 자유당의 일부 인사들뿐이었다. 비극이 예상된 이유는 그간 진행되던 선거운동에서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특히 한국의 국가보안법에서 자유로운 외신들은 더욱 적나라하게 보도했다. “투표소가 열리기 전에 미리 40퍼센트에 해당하는 표를 미리 투표함에 집어넣고… 자유당에 표를 던지도록 지시받은 유권자들은 3인조 혹은 9인조로 모여서 투표하고 투표용지를 잘 보이도록 밖으로 접어서 누구에게 찍었는가를 보이도록 한다”(<워싱턴 포스트> 1960.3.9),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은 민주당 참관인들이 등록하러 갈 때마다 ‘신비롭게도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뉴욕 타임스> 1960.3.14), “유엔이 한국의 통일 방안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유로운 선거’는 남북한이 저마다 자유선거를 실시할 능력이 없으므로 불가능”(<런던 타임스> 1960.3.17) 등등.” _192쪽
신문은 역사다!
1883년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가 발행된 이후에 신문은 당시 사회 현상을 파악하는 주요 자료가 되었다. 우리 근대사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그날과 그 사건의 기록을 담은 이 책이, 어떻게 과거가 현재 그리고 미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시켜 줄 것이다. 1884년부터 1945년까지를 다룬 1권과 1945년부터 1960년까지 다룬 2권에 이어 3권과 4권으로 완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