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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포세대, 헬조선, 20대 투표율 신화, 청년 논객, 학벌주의, 비트코인…… 청년 팔아 이익 챙기는 한국 사회, 누가, 왜? 여기저기 ‘청년’ 이야기가 난무하는 세상이다. 대중매체는 물론 국가 정책, 정치, 각종 사회 이슈에 이르기까지, ‘청년’이 등장하지 않는 영역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청년 담론은 포화 상태다. 소위 ‘청년’을 위하고 걱정한다는 이 수많은 청년 담론이 조직되는 동안, 실제 청년들의 삶은 과연 얼마나 나아졌을까? 혹시 반대로 청년 담론이 청년들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든 건 아닐까? 전국/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청년유니온 등의 청년단체 활동을 지속하며 10년 이상 청년 담론 및 세대 담론을 탐구해온 저자 김선기는 (세대주의와 연령주의에 기초한) 청년 담론이 오히려 청년들의 가능성을 막고, 그들을 유별난 존재로 분리시킨다고 진단한다. 청년 담론이 청년들을 타자화하는 강력한 기제가 된다는 지적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한국 세대 담론의 지형도에서 청년세대 담론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에 주목하며 답을 구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근거 없는 편견으로 가득 찬 청년 담론에 공모하고, 그 억압의 메커니즘을 강화하는 다양한 주체들을 만나게 된다. ‘팔리는’ 상품, 청년 오늘날 ‘청년’은 삶 곳곳을 지배하는 ‘기호’가 되었다. 각종 대중매체, 정치권, 기업 광고는 물론 비트코인, 남북 관계, 스포츠 스타 관련 이슈들까지, ‘청년’은 어디든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 소재이자 셀링포인트다. 청년세대를 상징하는 ‘헬조선’ ‘미생’ ‘3포세대’ 따위의 단어들이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며 주목을 받고, 그것이 곧 영화, 드라마, 웹툰, 음악 등 각종 문화 텍스트와 마케팅의 소재가 된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돌연변이> <국제시장> 등의 영화들은 개봉 당시 큰 화제를 모았는데, 무엇보다도 ‘N포세대’ ‘청년실업’ ‘취업난과 가난으로 위기에 몰린 청년’ 같은 ‘청년 문제’ 프레임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 그중 <국제시장>은 ‘청년세대와 기성세대의 대립 구도’와 ‘세대 갈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지속적으로 회자됐다. 작품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그 과정 전반을 매개하는 비평에 이르기까지, ‘청년/청춘’ 혹은 ‘세대’에 대한 특수한 이해 방식이 응집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세대와 무관한 각종 사회 이슈 역시 (청년)세대론의 외피를 두르고 등장한다. 지난 2017년 언론과 정부는 비트코인 문제와 관련해, 20~30대 젊은 층이 ‘흙수저’를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혹은 단시간에 돈을 벌기 위해 비트코인에 뛰어든다며 우려를 표한 바 있다.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에 진출한 테니스 선수 정현이 화제가 됐을 때도 어김없이 ‘청년세대’ 프레임이 제출됐다. 다수 매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정현 선수를 ‘청년세대’로 호명한 것이다. 언론들은 그가 “글로벌 수준의 실력과 자신감, 영어, 세련된 매너, 거기에 유머감각까지 갖춘 한국 청년세대의 한 표본”이라며 입을 모았고, “높은 실업률과 기회의 불공정이 이들(청년세대)을 괴롭힐지언정 그 저력과 패기를 꺾지는 못할 것”이라는, ‘비트코인’ 때와는 사뭇 다른 종류의 청년 담론을 내놓았다. 청년세대론은 남북 관계를 분석할 때도 적용된다. 통일 혹은 대북 인식이 세대별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식의 해석이 심심찮게 반복된다.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 비해 북한, 통일에 대해 더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다는 게 주된 논지다. 이런 주장은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여자 아이스하키팀 남북 단일팀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언론은 청년세대가 기성세대와 ‘공정성’에 대한 다른 감각을 갖고 있어서 남북단일팀에 반대한다며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쳤다. 이쯤 되면 청년세대에게 쏟아지는 일련의 스포트라이트 세례를 강력히 의심해볼 만하다. 다른 무엇도 아닌 ‘세대’ 그렇다면 왜 ‘청년’인 걸까?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수많은 ‘청년세대 담론’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기 앞서 한 가지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청년’에 대한 이 어마어마한 관심들이 ‘청년 개인’이 아닌 ‘청년세대’라는 집단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세대’다. ‘세대’는 어떻게 사회 현실을 설명하는 강력한 지식이 되었을까? 또 어떻게 개인을 ‘세대’라는 범주로 집단화할 수 있는 것일까? “세대의 중심성을 주장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문제들을 세대 개념으로 풀어 이야기하는”(로버트 볼) 방식을 흔히 우리는 ‘세대주의’라 부른다. 세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에서 세대주의는 주로 1990년대 이래 대중매체, 기업과 광고기획사, 정치권을 통해 확산되었다고 분석된다. 그렇다고 해도 실제로 사람들이 어떻게 세대 문제가 중요하다는 믿음을 공유하게 되었는지, 즉 왜 ‘세대’라는 범주로 현실을 설명하는 일이 정당하다고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는지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주의가 퇴조하며 ‘계급’ 대신 ‘세대’나 ‘젠더’가 사회를 설명하는 핵심 범주로 부상했다는 논의도 있지만, 왜 그게 하필이면 ‘세대’였는지를 온전히 해명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세대 담론이 왜 이렇게까지 일상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세대론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프레임으로 군림하는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는 일이다. 어쩌면 그 수많은 세대 명칭과 논의들이 ‘세대’ 범주가 정당하다고 믿는 우리의 무의식을 방증해주는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를 강타한 청년세대론: ‘신세대’ ‘세대 정치’ ‘88만원세대’ 사람들이 유독 ‘세대’ 범주에 의존하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왜 ‘청년세대’만 언제나 특별히 주목받는 걸까? 또한 그 주목은 왜 대체로 청년들에게 ‘혐의’ 덧씌우기로 귀결될까? 이를테면, 나라를 부정하고 ‘헬조선’을 외친다는 혐의, 윗세대에게 불만이 많다는 혐의, 어려움 없이 자라 인내심이 없다는 혐의들 말이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로 요약되는 그 원초적인 세대론은 이제 정치, 경제, 문화, 정책 영역에서 통용되는 ‘어엿한’ 지식으로 구축됐다. 1990년대 초반은 한국 사회의 세대 담론이 중요한 변곡점을 맞이한 시기로, 세대 연구가 활발해지고 ‘세대’라는 용어가 일상화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출현한 ‘신세대론’은 “보통명사로서의 신세대와는 다른” 의미로 “대략 70년대에 출생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의 젊은이를 그들 특유의 특성과 관련지어 지칭하는 고유명사”의 지위를 획득했다. ‘신세대론’의 주창자들은 ‘신세대’가 ‘자유와 풍유로운 삶’ 또는 ‘새로운 저항’을 추구한다고 주장했다. ‘오렌지족’과 ‘낑깡족’이 바로 그 그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창한 ‘신세대’의 실체는 정작 모호했다. 일부 대학생들은 “신세대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자기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 궁금해”했고, “막상 자신은 신세대의 범주에서 빼주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신세대론이 말하는 저항의 근거가 빈약하다거나, 세대 중심적 사고틀이 “계급, 경제, 지역, 환경, 민족 등의 사회적 갈등들”을 주변화하고 은폐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상업주의로 무장한 저널리즘과 광고 회사들이 젊은 층을 소비주의 문화로 끌어들이기 위해 신세대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혐의도 제기됐다. 2002년은 젊은 층에게 또 한 번 폭발적인 관심이 쏟아진 해였다. 그 관심은 현실 정치의 맥락에 기초하고 있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젊은 층의 높은 지지를 받으며 대선 후보가 되었는데, 세대 문제가 현실 정치에서 그토록 큰 이슈가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후 열린우리당이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 역풍을 맞아 과반 의석을 얻는 성과를 거둔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아예 ‘인터넷’을 무기 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