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적 리얼리즘이 탄생한 땅, 남아메리카는 또한 방랑의 대륙이었다.
방대한 크기만큼 남아메리카에 대한 인상은 제각각이지만 노동효 작가에게 남아메리카는 방랑의 대륙이었다. 유럽의 방랑족으로 보헤미안, 집시가 있고 북아메리카에서 자생한 히피는 1960년대를 정점으로 소멸한 인간류쯤으로 여겨진다. 작가는 남아메리카에서 히피족과 조우하게 된다. 북아메리카에서 여피(yuppie)가 부상하고 히피가 쪼그라드는 사이 히피가 추구했던 가치?사랑, 평화, 자유 -는 다양한 예술분야에 실려 남아메리카 전역으로 전해졌고, 방랑의 물결이 남아메리카 전역으로 번졌다.
레인보우 패밀리 오브 리빙 라이트(Rainbow Family of Living Light)를 뜻하는 ‘무지개 가족’은 1972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히피 공동체 모임으로 노동효 작가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길 위에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배운다.
무지개 모임은 학교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참가자가 탱고 수업을, 에콰도르에서 온 이는 카혼(남미의 북) 연주하는 법을, 인도를 다녀온 이는 요가 수업을,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교사가 되고 학생이 된다. 매듭공예를 팔며 여행하는 히피에게선 팔찌와 목걸이 만든 법을 배우고, 서커스 단원에게서는 저글링, 곤봉, 데블스틱 묘기를 배운다. 무지개 모임에서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한 이는 다른 나라, 지역에 무지개 씨앗을 퍼뜨린다.
-「볼리비아_무지개 씨앗을 나눠드립니다」 중에서
히피 숲 공동체 체험과 아르헨티나 히피 출신 막시를 통해 저글링을 익힌 작가는 에콰도르에서 국제방랑서커스단의 일원이 되어 마을 장터 공연에 참가하고 세마포로(신호등)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콜롬비아에서 히피들의 서커스 학교에도 참가한다.
모든 게 낯설고 신기했다. 무엇보다 뮤직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것도 아니고, 한낱 ‘광대짓’을 배우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시골 농장에 와서 며칠씩이나 지낸다는 게 가장 놀라웠다.
“남아메리카에서 서커스를 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저녁을 먹으며 내가 물었다.
“아마도 백만 명은 넘을걸.” 마리아가 대답했다.
-「콜롬비아_마술적 사실주의를 낳은 나라에서 서커스를!」 중에서
많은 여행안내서에서 ‘남미는 치안이 불안하고, 불량배로 가득하고, 소매치기와 강도 사건이 비일비재하다’고 소개하지만, 작가는 각 도시에서 가장 허름한 숙소를 찾아다니며 유럽이나 북미출신 배낭여행자나 일반 관광객이 아닌 현지에서 살아 숨 쉬는 방랑자들을 만난다. 남아메리카는 여행자들의 불안과 불편을 털어버릴 만큼 강력한 매력을 발산하는 곳이었다.
가진 게 적을수록 사람들은 경계심이 적었고, 덕분에 마음 따뜻한 벗들을 사귈 수 있었다. 어쩌다 만난 한국인 여행자들이 묻곤 했다. “그런 곳에 가면 위험하지 않아?” 아니, 정말 위험한 숙박업소는 입을 꾹 다문 채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들여다보는 관광객들로 가득한 곳이다. 친구들이 부르는 노래, 흥겨운 기타 소리, 둥둥 북소리,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아니라 핸드폰으로 듣는 음악과 액정 화면 속 자기만의 여행에 갇혀 버린.
-「우루과이_콜로니아에서 진짜 파티를!」 중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길 vs. 다른 곳에서의 삶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1943~)는 도시를 거점으로 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바꾸어 가는 새로운 인류의 출현을 예견한 바 있다. 그는 마음껏 삶의 자유를 누리는 부유한 유목민, 외국인 근로자나 쫓겨난 농민과 같이 어쩔 수 없이 떠돌아다니는 가난한 유목민, 그리고 부유한 유목민을 꿈꾸는 정착자로서 가상의 유목민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노동효 작가가 만난 히피는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가 분류한 유목민에서도 벗어난 종족인 듯하다.
내 친구들은 ‘문명이 요구하는 노동에 시간을 사용하길 거부’했고 ‘공간이라는 가로 좌표와 시간이라는 세로 좌표’에 고정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무실이 ‘길’라고 여겼고, 매일 같은 장소에 앉아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삶을 견딜 수 없어 했다. 낯선 도시의 광장이나 길바닥에 앉아 수공예품을 만들고, 악기를 연주하고, 서커스 공연을 하며 돈을 벌고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벗을 사귀었다.
-「에콰도르_유목민은 단지 성을 지나갈 뿐이다」 중에서
한국과 다른 대륙을 2~3년 주기로 옮겨 다니며 여행하는 작가, 노동효는 고국에서 체류할 땐 시청이나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했다는데 2017년 대선 당시 2,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아마존 뱃길을 10일간에 걸쳐 횡단한 후 투표장이 있는 페루 리마에 도착, 투표권을 행사한다. ‘인간은 모국어로 생각하는 존재’라는 작가의 분투가 눈물겹다. 노동효 작가의 여행기는 자신이 전하고 싶은 진솔한 ‘메시지’에 ‘여행’이란 달콤한 설탕을 입힌 당의정(糖衣錠)같다.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바깥 세계를 보는 즐거움과 더불어 쓰린 처방약처럼 쌉쌀한 맛이 남는다.
정주의식이 희박한 유목민과 고향, 학교, 출신을 중히 여기는 정착민 사이의 경계인으로서 작가가 우리 앞에 내려놓은 이야기는 때론 아프기도 하다. 해진 바지를 여기저기 기워 입은 작가를 본 한인 민박집 주인의 이야기처럼.
그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질문인지 단정인지 모를 말을 계속 내뱉었다. “당신 가난하잖아! 내가 다 안다고.” 그러더니 느닷없이 신세한탄을 늘어놓는가 싶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를 두고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술이 깬 그가 물었다.
“한국에 있을 땐 어디서 살았어?”
“서울.”
“서울에 집이 있어?”
“응.”
“집은 어떻게 하고 이렇게 오래 여행을 다니는 거야?”
“빈집으로 둘 순 없어서 지금은 아는 동생이 그 집에서 지내.”
“너 부자구나, 서울에 집이 있다니.”
내 대답과 동시에 스프링처럼 튀어나온 그의 대꾸였다. 얼키설키 기운 바지를 입고 나타난 내 행색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물질에 찌든 한국이 싫어서 칠레로 왔다고 하고선 자신이 떠나 온 곳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 있지 않았다.
-「페루_천국의 골짜기에 깃든 파블로 네루다의 방」중에서
저가항공사, 스마트폰, 여행 앱으로 대변되는 기술의 발달로 여행이 가장 즐거운 도락이 된 여행광들의 시대, 노동효 작가는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을 몸으로 밀고나가 ‘다른 곳에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다른 세계, 다른 삶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노동효 작가의 이야기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것이다. 마르셀 푸르스트는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남미 히피 로드>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눈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남미로 떠난 여행자는 돌아올 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여행을 하고, 여행은 인간을 만들어냈다. 여행이 만든 대표적인 인물로는 부처, 예수, 공자 등 성인들 외에도 바이런, 다윈, 헤밍웨이, 에릭 호퍼 같은 시인, 박물학자, 소설가, 철학자 등 인물군은 다양하다. 그리고 여행은, 혁명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 사르트르가 극찬했던 체 게베라는 첫번째 남아메리카 여행이 끝났을 때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볼리비아_살아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중에서
인터뷰_어떻게 이런 여행이 가능한지, 묻고 답하다.
자신의 뼈를 결코 지구에 묻지 않겠다고 선언한 노동효 작가의 배후가 궁금한 분들을 위해 권말에 20페이지에 달하는 저자 인터뷰 실어 독자들의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