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의 삶을 모으고,
역사의 흔적들과 대화하는 일에 빠져 있다”
평범한 물건이 역사가 되는 순간,
어느 컬렉터의 특별하고 가슴 뛰는 역사 읽기
30여 년 전, 선사시대 유적지에서 우연히 찾은 토기 파편 하나가 열정적인 역사 수집의 시작이었다. 사진 한 장에서부터 일기장, 편지, 영수증, 사인, 사직서, 온갖 증명서까지 개개인의 삶과 일상이 담긴 물건들을 모으고 또 모았다. 자료에 숨겨진 역사적 코드들을 하나둘씩 추적하고, 그날을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면서 역사의 조각들을 맞춰가는 시간은 희열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30여 년간 한결같이 컬렉터를 사로잡은 수집과 역사 읽기의 흥미로운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1. 컬렉터의 특별한 역사 읽기
―수집품과 대화하며 역사 속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되살려내다
흔히 ‘컬렉터’ 하면 아주 오래된 유물이나 값비싼 예술품을 수집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그런데 여기 사진 한 장에서부터 영수증, 일기, 편지, 사직서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묻어 있는 생활 자료를 모아 그 속에 숨은 역사의 퍼즐을 맞추는 재미에 흠뻑 빠진 컬렉터가 있다. 30여 년간 발품을 팔아 직접 찾아낸 이 자료들은 겉으로 보기에 사소하고 평범한 것 같지만, 수집품 하나하나가 가슴 뛰는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수집품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와 역사가 담겨 있는지 추적하며 끊임없이 자료와 대화를 시도한다.
이 책은 컬렉터의 방대한 수집품 가운데 시대상이 생생히 드러나고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14가지 수집품을 소개하며, 평범하지만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물건들을 통해 거대 역사에 가려져 있던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생생히 복원한다. 독립협회 보조금 영수증에 쓰인 날짜를 통해 독립문이 건립될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독립’의 의미를 다시 집어보고, 한강 다리를 몇 번이나 오갔다는 내용의 눈물 젖은 엽서에서 대한제국의 청년이 겪은 생활고와 취업난을 떠올리며, 일장기를 재활용해 만든 태극기에서 갑작스레 찾아온 독립의 환희를 느끼고, 한 고등학교의 육상대회 우승 기념사진 한 장에서 전쟁도 지우지 못한 민중의 삶을 되살려낸다.
이처럼 이 책은 컬렉터와 수집품들의 대화록이자 역사 속 ‘이름 없는 그들’과 나누는 대화이다. 어디에나 있을 것 같지만 쉽게 접할 수 없는 컬렉터의 수집품과 그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격동의 한국 근현대를 살던 사람들이 느낀 희노애락과 욕망, 좌절, 그리고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도전들을 오롯이 마주할 수 있다.
나의 수집은 단순히 옛날 물건을 찾아 모으는 행위가 아니라, 역사의 흔적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역사의 단편들을 만나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나는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자료들을 찾고 또 수집했다. 일기장, 팸플릿, 신문, 잡지, 생활 문서, 사진 자료만이 아니라 크기나 재질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역사 자료를 수집했다. 그 자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어떤 것은 화난 표정을 짓고 있고, 어떤 것은 흥겨움과 기쁨의 감정을 담고 있다. 또 어떤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과 슬픔을 간직하고 있고, 어떤 것은 삶의 표정이 그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책을 펴내며〉(7~8쪽) 중에서
내 수집품 중에 낡은 태극기가 한 장 있다. 이 태극기는 사괘를 먹으로 대충 그린 것인데, 태극은 빨간색뿐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빨간색 위에 파란색을 덧칠한 흔적이 있다. 일장기를 가지고 손수 꾸며 만든 태극기였다. 1945년 8월 15일, 한국인들은 느닷없이 광복을 맞았다. 사람들은 그 기쁨에 겨워 태극기를 흔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태극기를 구하기가 쉽지 않은 참에 일장기가 눈에 띈 것이다. 그렇지! 일장기 위에 태극문양과 사괘만 그려 넣으면 된다. 태극기를 일장기로 만들기는 어려워도, 일장기를 태극기로 만들기는 쉬웠을 것이다. 이처럼 광복 직후에 사용된 태극기는 상당수가 일장기를 재활용한 것이었다. …… 나는 일장기를 재활용한 태극기에서 일제강점기 35년의 세월을 감내하고 광복을 맞이했던 당시 한국인들의 감격과 환희를 느낀다. ―〈책을 펴내며〉(7쪽) 중에서
2. 컬렉터가 수집품과 대화하는 법
―물건에 담긴 이야기를 추적해 역사의 퍼즐을 맞추다
컬렉터가 수집품과 대화하는 과정, 곧 물건에 담긴 이야기를 추적하는 과정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역사 읽기의 참맛을 선사한다.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퍼즐 조각을 하나씩 찾아내고 맞춰야 한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한국전쟁 중 육상경기대회 기념사진’(211쪽)은 그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 사진은 어느 고등학교 교사와 학생 들이 찍은 육상대회 우승 기념사진이다. 사진에 적힌 날은 1952년 7월, 한국전쟁 중에 찍은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장소는? 어느 지역의 학교일까? 컬렉터는 사진에 적힌 ‘영동학교 육상경기대회 기념 우승’이라는 문구에서 ‘강원도’라는 조각을, 학생들이 입은 운동복에 새겨진 교표 모양으로 ‘삼척 공고’라는 조각을 찾아낸다. 이제 가장 중요한 조각이 남았다. 전쟁 중에 어떻게 육상대회가 열렸을까? 이 조각을 찾기 위해서는 한국전쟁 중 삼척 일대 상황을 살펴야 한다. 익히 알려진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삼척시 역사까지 찾아본 컬렉터는, 삼척이 북한군 치하에 있던 기간이 길지 않았고 1·4후퇴 이후 북한군이 삼척까지 남하하지 못했으며, 1951년 7월 휴전회담 이후 전투는 오늘날의 휴전선 근처에서 고지전의 형태로만 일어났기 때문에, 사진을 찍은 시기는 예전의 일상을 회복해가던 시기였음을 밝혀낸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사진 속에서 유리가 없는 창문과 군경원호 포스터 등에 주목하며, 전쟁 속 일상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도 함께 읽어낸다.
전쟁에도 삶은 계속되었다. 생필품을 사고파는 시장이 열리고, 노천 천막 아래에서도 수업을 하고, 교회 종소리와 기도 소리는 평화를 갈구하며 예배당을 가득 채웠다. …… 수집한 사진 중에 이런 역사의 속살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이 있다. 어느 고등학교 교사와 학생 들이 찍은 육상대회 우승 기념사진으로, 2017년 4월에 수집한 것이다. 사진에 적힌 연도가 단기 4285년 7월 13일이니 서기로 1952년, 한국전쟁 중에 찍은 것이다. 전쟁 때 육상대회라…….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대회가 열린 곳이 전선과 멀지 않은 지역이어서 더욱 그렇다. ‘전쟁 중에도 일상 이 계속될 수 있을까?’ 이 물음이 내가 이 사진을 수집한 이유다.
―〈MY COLLECTION 11 전쟁도 지우지 못하는 민중의 삶에 대하여〉(214~216쪽) 중에서
3. 교과서가 들려주는 역사를 넘어
―생활 속 자료들로 만나는 ‘살아 있는’ 한국 근현대사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는 거대하고 구조적이다. 그것이 역사의 전부라면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컬렉터는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는 반쪽짜리 역사”라고 말한다.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났을 때도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을 살며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기록하고 남겼다.
이 책은 조선이 세계에 문을 열던 19세기 말부터 유신체제가 만들어진 1970년대까지, 시대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과 더불어 그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았다. 컬렉터의 수집품을 남긴 주인공 대부분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결코 가볍거나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 너머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야말로 온전히 ‘살아 있는’, ‘진짜’ 한국 근현대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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