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생존작가 장 아메리, 드디어 한국 번역 소개!
자살의 자유에 대한 논쟁적 성찰! 현대 자살론의 고전
삶과 죽음에 대한 통념을 바수는 진실하고 처절한 에세이!
폭력의 세기에 대한 증언, 고통의 기억 속에서 탄생한 휴머니즘
“자유죽음을 미친 짓으로만 몰아세우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뛰어내렸다고 해서 반드시 미친 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살피지 않고 무조건 ‘정신착란’이거나 ‘광기’로 낙인찍어서는 안 된다.”
“자유죽음은 부조리하지만, 어리석은 짓은 아니다. 자유죽음이 갖는 부조리함은 인생의 부조리를 늘리는 게 아니라 줄여준다. 적어도 우리는 자유죽음이 인생과 관련한 모든 거짓말을 회수하게 만든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 오로지 그 거짓이라는 성격 때문에 괴롭게 만든 것을 자유죽음은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죽는 것만 못한 삶이라면, ‘치욕스런 좌절과 냉혹한 실패 상태에서의 인생이 더욱 추한 것이라면, 존엄성과 자유를 가지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더 이상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경우, 존엄성과 자유는 곧 율법이 된다. 주체는 완전한 주권을 가지고 결정을 내린다. …선택과 결정은 오로지 당사자 개인의 문제이다. 그는 자신의 독자성을 위해,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고유한 것이 아니었던 생명이라는 고유 재산을 파괴한다. 손을 내려놓는다."
■ 고통을 넘어 자유를 예찬한 ‘숭고한 인간의 이름’ 장 아메리는 누구인가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한 지식인의 ‘폭력의 시대’에 대한 비망록
장 아메리는 1912년 10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붙여준 이름은 한스 차임 마이어(Hans Chaim Mayer). 그는 문학과 철학 학위를 가진 지식인이었다. 프리모 레비, 엘리 위젤과 함께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증언작가’ 3인방으로 꼽히는 그는 『자유죽음』을 쓰고나서 2년 뒤인 1978년 10월 17일 잘츠부르크의 한 호텔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 이른바 ‘자유죽음’을 실행하였다.
“반유대주의가 있기에 유대인인 내가 태어났다”고 말했던 아메리는 열아홉 살이 되기 전까지 가톨릭 문화에 적응하며 살면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졸지에 유대인 부인과 함께 낙인찍혀야 했던 그는 벨기에로 건너가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한다. 유대인의 혈통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굴욕과 모멸을 안기던 나치 권력에 아메리는 저항했으나 세상은 그를 밀고하고 추방했다. 나치의 손아귀에 있던 프랑스 남부의 귀르 수용소에 갇혔다가 탈출에 성공하고, 다시 벨기에로 잠입해 더욱 처절한 싸움을 벌이던 아메리는 2년여의 지하투쟁 끝에 1943년 7월 또다시 게슈타포에 붙들린다. 모진 고문과 치욕 속에서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등 나치 수용소로 끌려 다닌 그는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1945년 독일의 패망으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후 브뤼셀에 정착한 아메리는 신문의 문화 담당 기자로 일하며, “이 끔찍한 세상에서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안고 평생 홀로 고통스럽게 살았다. 무지막지한 고문, 인생이라는 이름의 부조리, 삶을 허락하고 죽음을 강요하는 신 앞에서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생명을 잃어버린(!) 자”가 되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아메리. 전쟁의 끝이 그 싸움의 끝은 아니었다. 그는 입을 다물게 만들려는 세력의 회유와 압박에 적잖이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아메리는 늘 초연하고 정갈했다.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이었던 것처럼,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삶의 길을 열어준다”라고 말하며….
독일어를 매우 사랑했던 언어학자였던 아메리는 수용소에서 자신의 모어(母語)인 독일어가 훼손되는 것을 괴로워했다. 어느 날 직업이 뭐냐고 묻는 독일군에게 ‘독일문학자’라고 대답하자 친위대원은 크게 화를 내며 아메리를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팼다. 이후 해방이 되자 그는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장 아메리로 바꾸고 고향을 떠나 살며 죽을 때까지 독일어로 글을 쓰며 살았다. 그는 자신의 글이 독일에서 출판되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고 스위스에서만 책을 출간했다.
아메리는 애초에 강제수용소에서의 가혹한 경험을 글로 남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눈물로 용서를 구한 젊은 독일 시인(헬무트 하이센뷔텔)과의 우정과 권유로 『죄와 속죄의 저편』(1966년, 영어 제목은 ‘정신의 한계에서’)이라는 제목으로 아우슈비츠에서 당한 고문과 폭력을 기록한 책을 독일어로 출간하게 된다. 1970년 독일 비평가상, 1971년 바이에른의 ‘아름다운 예술아카데미’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77년에는 함부르크 시가 수여하는 레싱상을 수상할 정도로 장 아메리의 독일어 글쓰기는 정평이 나 있다.
아메리의 주저(主著)로 불리는 『자유죽음』은 단순히 ‘자살론’이나 ‘회고록’이 아니다. 한 지식인이 끔찍한 세기를 관통하며 겪은 ‘시대의 비망록’이다. 그가 ‘자유죽음’을 선택하자 역시 수용소를 체험한 유대인 ‘증언문학’의 대표작가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쓴다. “인생에서 목적을 가지는 것은 죽음에 대한 최선의 방어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용소에서만 할 일이 아니다.” 수용소에서 끝내 인간적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레비에게, ‘수용소 이후’ 인생 최대의 목적은 증언을 통한 인간성의 재건이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증언의 의무’를 강조했던 레비에게 동료 유대인 아메리의 자살은 크나큰 충격을 주었으리라. 아메리의 죽음을 두고서 모든 존재 증명을 부정당했던 사람이 부조리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고 해석했던 레비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아파트 난간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만다. 극한의 고통을 견디고 살아남은 또 한 사람의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 “이 끔찍한 세상에서 왜 살아야 하는가?” 죽음에 대한 적극적 명상!
-자살에 대한 금기와 편견을 허무는, 삶의 진실에 육박하는 철학적 에세이
“이 글에서는 ‘자기 세계 속에 있는 자살자’와 만나려는 시도가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시도되는 것은 ‘자유죽음의 현상학’으로 자살자가 처한 상태에 대한 묘사이다. …자유죽음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외부로부터 ‘이해하려’ 하는 한 인식될 수 없는 자살자를 정당하게 이해해보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자살자는 ‘신의 권능에 도전한 자’였으며, 공동체와 가족으로부터의 의무를 져버린 패륜아이자 이기적인 배신자로 치부되었다. 장 아메리는 이러한 금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살을 결심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인지, ‘손을 내려놓기’ 직전에 그가 자기 자신과 타인-세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물음으로써 ‘자살의 자유’와 만나려고 한다.
장 아메리에게 자살은 “모든 삶의 충동, 살아 있는 존재의 끈질긴 자기보존 충동에 맞서” 인간 실존이 인간에게 보장하는 “자유를 가장 급진적으로, 어떤 점에서는 가장 생생하게” 실행하는 행위이다. 아메리는 ‘자기 자신을 살해’한다는 의미의 ‘자살’이란 단어를 ‘자유롭게 죽음을 선택한다’는 ‘자유죽음’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이때 아메리의 사유를 이끄는 것은 삶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경외와 자기 삶에 대한 자기 결정 권리, 그리고 자유에의 갈망이다.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게 강요하는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는 것이 바로 아메리가 말하고자 하는 자유이다. 이때 ‘자유죽음’은 “제 인생을 온전하게 살아내자”는 다짐과 다르지 않다.
아메리는 깊숙이 묻는다. 자살을 금기시하며 심지어 비자연적이고 몰지각한 범죄 행위로 몰아붙이는 종교와 사회. 이것은 세상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살아남은 자들의 무심하고도 가혹한 편견과 선입견이 아닐까?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웃의 존엄과 자유를 짓밟는 추태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연사’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