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죽더라도 오늘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낸다면 행복할 거야”
좀비애와 가족애를 결합한 한국형 좀비물의 서막을 연 감동 스토리
한국형 좀비만화의 탄생을 알리는 《좀비의 시간》이 나왔다. 오랜만에 간 가족여행에서 주인공 준수는 갑자기 좀비에 물린다. 그러면서 청년 백수였던 소심한 준수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친구를 만나고, 연인과 사랑을 하고, 가족의 사랑을 깨닫는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뽀글이 머리 태권도 관장과 친구가 되고, 은행에서 일하던 애 딸린 이혼녀와 결혼을 하고 동시에 아들도 생긴다. 그렇게 준수는 “좀비에 물리고 난 다음 더 행복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형사반장으로 좀비 소통 작전을 맡은 아버지와의 극적인 만남.
《좀비의 시간》은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좀비영화나 만화와는 다르다. 피 튀기는 잔인한 장면이나 손과 발이 따로 노는 끔찍한 장면으로 좀비물의 장르적 특성을 따르지만, 이 작품이 말하고자하는 것은 좀비가 되어가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준수와 주변인물이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주류 인간들의 작은 반란이라고 봐도 좋겠다. 그러면서 결코 놓치지 않은 것은 만화 자체로서의 재미다. 기발한 상상력이 만든 웃음을 찾는 것도 이 작품을 보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촛불 좀비 VS 진짜 좀비
《좀비의 시간》은 광화문 사거리에 운집한 좀비를 군인과 경찰이 총으로 쏘아 죽이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주인공 준수와 형사반장 아버지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함께 무인도 여행을 했던 친구들과 좀비로 변한 준수를 만난 가족은 무차별 발포의 아수라장에서 급히 빠져나와 겨우 목숨을 구한다.
지난 6월 광화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외치는 시민을 향해 공권력은 살수차를 앞세웠고, 무차별 폭력을 행사했다. 무고한 시민을 붙잡아가기도 했다. 촛불시위에 반대하는 일부 인터넷 논객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시민들을 ‘촛불 좀비’라고 깎아내렸다.
《좀비의 시간》에는 사회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한다. 좀비 퇴치를 골프장에서 최종 지휘하는 경찰청장은 자신의 비리에 쏠린 언론의 눈을 피하고자 일부러 좀비 사태를 극단으로 몰아간다. 좀비에 물렸지만 아직 이성이 남아 있는 사람도 모조리 죽이라는 무시무시한 명령도 내린다. 언론에서 이 사건을 문제 삼자, 이번에는 좀비강제수용소를 만든다. 좀비에 물렸을 뿐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을 한순간에 범죄자 취급하기 시작한다. 과거 군사정권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나섰던 학생과 시민들의 자유를 박탈했던 방식과 비슷하다.
좌충우돌, 이경석 스타일
사회적인 메시지를 많이 담고 있지만, 《좀비의 시간》은 이경석 만화 특유의 상상력과 재치를 작품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짓는 준수 일행의 우스꽝스런 표정이나, 뽀글이의 태권도 학원에 취직한 준수가 출근하는 기분을 낸다며 양복을 입고 있는 모습도 재미있다.
뛰어난 상상력도 빛을 발한다. 손과 발 얼굴이 분리된 좀비가 좀비수용소를 탈출하는 장면이나, 은행에서 만난 마음 약한 강도를 작품 후반에 다시 만나는 것도 기발하다. 부록으로 선보이는 ‘진짜 좀비를 찾아라’와 ‘누구나 쉽게 푸는 완전정복 좀비의 시간 퀴즈’에서도 황당하고 독특한 설정 등으로 좌충우돌하는 이경석 만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경석 만화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수작업 원고다. 《좀비의 시간》 원본 원고는 아주 뛰어난 색감을 자랑한다. 만화용지에 직접 물감을 짜고 붓으로 그리기 때문에 컴퓨터로 컬러를 채우는 디지털의 색감과는 확연히 다르다.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쓴 손글씨 대사에도 정성이 가득하다.
이경석 스타일은 꾸준히 유지되고 발전되어 왔다. 전작인 《속주패왕전》 《오!해피산타》에서 시작되어 지금 만화 잡지 〈팝툰〉에 연재하고 있는 ‘전원교향곡’에서 꽃을 피우는 중이다. 2003년부터 어린이잡지 〈고래가 그랬어〉에도 ‘을식이는 재수 없어’라는 작품을 연재한다. 이경석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점점 다양해지는 우리 만화계에 그가 꼭 있어야 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