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디킨슨의 편지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 수잔!
에밀리 디킨슨의 오랜 친구이자 오빠의 부인이었던 수잔 헌팅턴 길버트 디킨슨(Susan Huntington Gilbert Dickinson, 1830-1913)은 디킨슨의 시를 가장 많이 받았고 가장 먼저 읽었던 독자이기도 했다. 둘은 어린시절부터 지척에 살면서 친분관계를 유지해 왔고, 10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다.
번역자 박혜란에 따르면, 에밀리 디킨슨은 수잔이 여행 중일 때면 어김없이 애머스트의 날씨와 주변 풍경을 전하고 가족의 안부와 사랑을 나누는 매우 다정하고 일상적인 안부 편지를 보냈고, 평소에도 자주 편지와 쪽지로 수잔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표현했다.
수, 널 그리워하는 게 힘이야. 아무리 많은 걸 소유해도 상실의 자극 탓에 다 하잘것없구나. 삶은 언제나 지속되지만 사랑은 삶보다 단단하다. 상처받은 마음은 오직 불멸을 넘어 계속 나아갈 뿐이야.
나무들이 온종일 널 위해 집을 지키고 풀들은 한풀 꺾인 듯하다. 조용한 암탉 하나가 미신에 잘 속는 병아리들과 그 자리에 자주 나타나고 – 수탉 하나가 네 바깥문을 두드려. 바라보는 자체가 로맨스야.
수잔과의 실뜨기로 빚어진 시의 버전들
디킨슨은 자신이 쓴 시를 보내고 수잔의 감상을 들은 뒤 기존 시를 대폭 수정해 거의 새로운 시로 발전시켜 나가기도 했다. 즉 두 사람은 누구보다 서로를 신뢰하는 문학적 동료 관계였다고도 할 수 있다. 『수 – 영원해!』는 시 한 편에서 파생된 여러 버전의 시를 모두 실음으로써, 에밀리 디킨슨이 수잔을 통해 어떻게 시를 변형하고 발전시키는지에 대한 과정 또한 담았다.
번역자 박혜란은 이 과정을 시를 수정해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이야기에서 파생되어 각기 다른 흐름과 정서를 가지게 된 여러 이야기로 본다. 놀이를 통해 태어나는 이야기로 본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시인이 쓴 첫 번째 시라는 실을 가지고 신나는 공동의 실뜨기를 하고, 그 시간을 유영하는 과정 속에서 함께 새로운 버전의 시를 빚어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반쯤 열린 채 독자를 향해 영원히 배달되는 편지
수잔과의 지적이고도 낭만적인 실뜨기와, 오로지 수잔만을 바라보며 써 내려간 사랑과 찬사의 시. 이 같은 장면에 기댄다면 우리는 디킨슨을 퀴어라 부를 수 있을까. 기성의 관습과 통념, 상징체계 바깥으로 스스럼없이 건너가는 이가 퀴어라면 디킨슨 역시 그러고도 남는 존재임에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수잔과 디킨슨, 두 사람의 사이를 채웠던 정동에 완전히 부합하는 단어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시 속의 문장은 언제나 이미 반쯤은 숨어 있는 문장이며, 무언가를 숨기는 문장이므로. 진술을 유예하며, 읽는 눈을 유인하는 시적 단서에 불과하므로.
번역자 박혜란 역시 시를 고르고 옮기고 또 역자 후기를 쓰는 동안, 시에 대한 감상이 시인의 전기적 사실을 캐내는 데 소비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시인의 문장을 무엇 하나로 정의 내리는 대신 “틈새의 언어”이자 “골방에서 다친 상처를 내보이며 깔깔댈 수 있는 속삭임”이자 “산책길에 옷깃에 묻혀 온 우엉 가시”라고 했다.
그렇다. 이처럼 이번 시집은 반쯤 열린 채 독자를 향해 무한히 생성되고 영원히 배달되는 편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수 - 영원해!』는 이제 그렇게 수 혹은 수잔이 아닌, 바로 그곳의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파시클과 번역
‘파시클’은 에밀리 디킨슨이 필사한 자신의 시를 모아 손수 제본한 각각의 책 자체를 가리킨다. 이 이름을 딴 출판사 파시클은 번역문학가 박혜란이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고르고 번역해 한 권, 한 권의 시집으로 엮기 위해 만들어졌다. 박혜란은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내러티브 이론을 연구하다가 내러티브와는 전혀 다른 글쓰기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 매료된 이후론 페미니즘 시학으로 전공을 바꿔 연구해 왔다.
파시클은 앞서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 시리즈로 첫 권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을 시작으로 시선 시리즈를 펴내고 있다. 지금까지 그림시집 『멜로디의 섬광』, 『어떤 비스듬 빛 하나』, 『바람의 술꾼』, 『장전된 총』, 『아니면 마자린 블루를 입은 – 정오를?』을 펴냈다.
에밀리 디킨슨을 보는 다양한 해석과 시각, 새로운 접근들
19세기 당시 미국 휘그당을 이끌었던 가문에서 태어나 결혼하지 않고 외부 세계와도 교류 없이 살았던 에밀리 디킨슨. 생전 공개하지 않았던 1,800편이 넘는 시가 침대와 옷장에서 발견되었다. 평생 흰옷만 입고 살았다는 이야기들은 일화를 넘어 시인을 묘사하는 데 늘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같아서, 그를 더욱 궁금하고 신비롭고 특별한 존재로 만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를 이상하고 사교성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도록 만들기도 했다.
병원 기록에 의하면, 오래도록 신경쇠약으로 고생했고 1830년 태어나 188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비혼으로 아버지의 저택에서 살았다. 10대를 보낸 애머스트 아카데미에서는 건강 탓에 학교를 쉬는 기간이 많았음에도 매우 총명하고 뛰어난 학생으로, 영어와 고전문학, 식물학, 기하학, 수학, 역사, 철학 등 학업에 열심이었다. 학교에서 수잔 헌팅턴 길버트를 비롯해 평생의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는데 친구들에게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수수께끼를 담은 시들을 보내거나 시 쓰기에 대한 애정과 열망을 고백하기도 했다. 가까운 이들에게는 상실과 아픔에 대한 격려와 위로를 담은 쪽지들을 보냈다.
은둔에 들어간 것으로 여겨지는 30대 중반 이후 평생 병석에 있던 어머니를 돌보고 가사를 책임지느라 고되었을 테지만, 56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내내 시 쓰기에 충실했다. 한편 디킨슨의 호밀빵은 유기농 레시피로 유명하고 시인의 정원은 정원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식물표본집도 식물학자들에게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개인적으로는 소중한 이들과 사별하며 겪은 상실과 변화가 시인의 언어와 사상의 흔적이 되어 후대 독자들에게 숙제를 남겼다. 시대에 따라 문학이론, 비평 방식이 바뀌고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최근에는 에밀리 디킨슨에 관한 다양한 해석과 시각을 담은 영화나 드라마도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