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서사를 두고 각각의 향을 풍기는 음식들은 즐비한데 그것들을 담아두고 있는 그릇이 없다, 라고 말한다면 과연 적합한 비유일까. 한 데 섞여 상위에 펼쳐진 음식이 즐비한데 입만 보인다. 그릇도 수저도 없이 널브러진 음식들과 입만이 존재하는 도구들의 결핍, 이 결핍은 과연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신예 소설가 장은진의 첫 번째 소설집 『키친 실험실』을 펴낸다. 장은진의 서사는 근래의 소설들이 보여주고 있는 탈문법화와 제3의 공간에 대한 거침없는 넘나듦보다는 ‘먹을 수 없는 것’을 먹는 ‘인간쓰레기’라 칭하는 인간 군상들을 리얼하게 그려내면서 그 인간들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잔인함의 근원에는 윤리와 사회가 버티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데 주력을 다하고 있는 책이다.
이 때 장은진의 음식들은 단순히 비유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소설이 얘기하고자 하는 동시에 소설이 완전하게 무너뜨리고 있는 ‘식탁공동체’에 대한 윤리적이며 사회적인 지점까지 관통하는 지점인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이유 하에 장은진의 서사는 거울에 가깝다. 장은진 소설에서 등장하는 버려진 존재이든 ‘먹을 수 없는 것’을 먹는 인물이든 ‘그녀는 적어도 하루 두 끼, 나와 똑같은 음식을 먹’는, ‘그녀와 나의 공통분모는 음식이다’라는 발화는 우리의 욕구와 그것을 채우는 방식은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공통분모가 깨져버렸을 때 존재가 가지고 있는 소통에 대한 결핍이 극한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타인과의 소통을 지향하고 갈망하면서도 타인과의 친밀한 교감이나 유대감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차단하는 장은진 소설의 인물들은 우리들의 얼굴과 멀리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장은진은 생존의 본능으로부터 배고픈 존재들을 넓은 대지로 끌어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식욕을 원초적인 본능으로 되돌려 도구를 쓰는 방식, 즉 소통하는 방법부터 다시 일러주는 목장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박진이 장은진을 두고 ‘이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오만한 믿음이나, 그런 믿음을 통해 정작 그녀 자신이 구원받고자 하는 기대마저 버리는’ 것이라 얘기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아픈 곳을 더 아프게 하는 덧난 얼굴로 서있는 우리들에게 그녀의 서사는 회복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