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비정상

아론 케리아티 ·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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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을 건강과 치유의 근본적인 주체로 보는 전통 의학이 무시되고 인간이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상실하게 된 현실을 고발한다. 또 기술 또는 과학, 그리고 자본으로 무장한 거대 세력들이 어떻게 대중을 통제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지, 공중보건 비상상태라는 명분하에 자행한 생체 감시와 차별의 조치를 어떻게 정당화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다움’을 어떻게 빼앗기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저자는 우리가 이와 같은 상황을 지금처럼 아무 저항 없이 수용했을 때 펼쳐질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려낸다. 2030년 시애틀의 모습을 그린 에필로그는 섬뜩하지만 그와 같은 현실이 결코 상상으로 그치지 않으리라는 합리적 추론을 하게 한다. 저자는 공동의 연대와 실천으로 우리는 그와 같은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하며,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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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프롤로그 제1장 가둠: 생물의학 보안국가 비상사태 |혁명의 인큐베이터|메가머신|디지털 파놉티콘|모의전쟁 같은 팬데믹|과학주의 추종 제2장 락다운 & 락아웃: 새로운 사회 패러다임 “증명서 좀 보여 주세요”|그라운드 제로|다른 팬데믹|케리아티 대 캘리포니아 대학|CDC 그리고 FDA와의 싸움|규제 포획 제3장 감금된 인간: 기술관료 디스토피아의 도래 생물보안이라는 신어|세계의 새로운 주인들|바이오디지털 감시|트랜스휴머니스트의 몽상|히포크라테스 의술 대 테크노크라트 의술|기계 속의 유령 제4장 자유의 회복: 더 뿌리 깊은 미래에서의 인간 번영 죽음에 이르는 병|얼굴을 보여 줄 때까지|정상상태|제도적 개혁|이성의 간교함|뿌리의 필요성 에필로그: 시애틀, 2030 옮긴이 말 주

Description

코비드를 계기로 감시와 권위주의로 사회를 통제하기 시작한 팬데믹 전략 그로 인해 탄생한 “생물의학 보안국가”라는 새로운 비정상에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정신과 의사이자 의료윤리위원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아론 케리아티는 코로나19 팬데믹의 공포 속에, 공중보건과 과학이이라는 명분 아래 ‘내용 고지에 입각한 동의’, ‘피해 우선 고려’, ‘정의’와 같은 의료 윤리의 기본 원칙들이 공공 안전을 명분으로 사회적 논의 없이 무시되는 현실에 저항했다가 대학에서 해고되었다. 그는 자신이 해고되고 저항하는 과정, 그리고 진료 현장에서 비상사태라는 명목하에 점점 침입적 감시와 권위주의적인 사회 통제가 정당화되는 새로운 전체주의적 체제의 도래를 목도하게 된다. 저자는 팬데믹으로 인해 등장한 ‘새로운 비정상’ 사회를 생물의학 보안국가로 명명하고, 그것을 공중보건, 감시와 통제의 디지털 기술, 국가의 경찰권이라는 3자의 위험한 동맹체제로 규정한다. 이 책은 인간의 몸을 건강과 치유의 근본적인 주체로 보는 전통 의학이 무시되고 인간이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상실하게 된 현실을 고발한다. 또 기술 또는 과학, 그리고 자본으로 무장한 거대 세력들이 어떻게 대중을 통제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지, 공중보건 비상상태라는 명분하에 자행한 생체 감시와 차별의 조치를 어떻게 정당화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다움’을 어떻게 빼앗기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저자는 우리가 이와 같은 상황을 지금처럼 아무 저항 없이 수용했을 때 펼쳐질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려낸다. 2030년 시애틀의 모습을 그린 에필로그는 섬뜩하지만 그와 같은 현실이 결코 상상으로 그치지 않으리라는 합리적 추론을 하게 한다. 저자는 공동의 연대와 실천으로 우리는 그와 같은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하며, 그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안한다. 책 주요 내용 침입적 감시와 권의주의적 사회 통제 그리고 인간의 상실 이 책은 먼저 팬데믹이라는 공중보건의 비상사태에서 공공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조치로 내려진 락다운 정책의 문제와 그 속에 감춰진 의도를 짚는 것으로 시작한다. 행정명령에 의한 비상사태는 사회적 논의나 민주적 절차 없이 너무 쉽게 선포되었다. 그것이 이미 선포되고 나면 국가권력은 초법적으로 개인의 삶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권위주의적 대책들을 서슴없이 시행한다. 감염자를 강제격리하고 휴교와 휴업을 명령하며 출입과 이동을 제한한다. 디지털 기술은 공공 안전을 위한 획기적인 발명품처럼 선전되지만 그 기술로 수집된 정보는 때로 차별과 낙인찍기에 악용되고, 사회 구성원들을 통제하는 데 이용된다. 지문, 홍채, 안면, 보행 같은 생체 특성이 신분 확인과 동선 감시, 개인 건강 정보를 통한 질병 전파 위험 감시, 휴대전화 위치 추적 등에 적극 이용되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거대한 ‘디지털 파놉티콘’에 갇히게 되지만 아무도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우리는 기꺼이 동조했다. 간혹 문제를 제기하는 소수는 공공의 안전을 해치는 위험인물로 매도된다.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공민권이 아무렇지 않게 침해되고, 이웃과 친구를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게 하고,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고, 이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저항하면 돌아오는 것은 차별과 배제다. 심지어 때로는 의도가 전혀 없는 행위마저도 매도당해 사회적 비난을 초래한다. 이와 같은 일은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미국뿐 아니라 팬데믹 시기에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벌어졌다. 저자는 팬데믹 기간 동안 행해진 침입적 감시와 권위주의적 사회 통제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고 적극적으로 성찰해야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예견한 디스토피아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난 몇 년 사이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자유만이 아니다. 더 비극적이고 중요한 문제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훼손당했다는 것이다. “대중 감시 기술의 등장으로 우리는 이제 일종의 세계적인 디지털 파놉티콘에서 살고 있다. 여기서는 시민 각자가 간수이자 동시에 수감자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지배자의 질책을 두려워하고, 서로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모든 이웃이 잠재적 밀고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든 잠재적 밀고자는 주머니 안에 스마트폰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 이것은 디지털 파놉티콘이 단순히 은유가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사람들이 실제로 감시하고 있다.”(70쪽)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주의다 저자는 코로나19가 기술의 시대, 과학이 승리한 시대에 등장한 첫 번째 팬데믹으로 정의한다. 팬데믹과 관련한 많은 설명과 대응조치는 과학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사람들은 전문가, 과학이라는 이름 앞에 겸손해지는 경향이 있다.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들은 그런 대중심리를 이용한다. 그들은 합리주의를 추종하는 엘리트 행정가들로, 과학기술의 힘을 숭상한다. 공공복리를 위해 과학적 방법론과 데이터를 근거로 정책을 결정한다고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과학은 어느 순간 누군가의 입을 틀어막는 수단이 된 듯하다. 상대의 반론 제기를 몰상식으로 몰아세운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주의일 확률이 높다. 과학주의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을 띤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신념이고 종교일 뿐이다.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정책이 과학과 전문가에 근거에 행해졌고, 공포에 눌린 사람들은 말없이 따랐다. 케리아티처럼 이에 저항한 사람들은 ‘비과학적’이라거나 불순분자 취급을 받으며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케리아티는 이런 과학에 대한 맹신의 위험성을 경고함과 동시에 많은 기술관료와 과학자들이 거대 자본에 포획된 사실도 폭로한다. “과학의 특징적인 요소는 정당한 불확실성이다. 여기서 지적 겸손이 발로한다. 과학주의의 특징적인 요소는 부당한 확실성이다. 이것은 지적 오만으로 귀결된다.” (98쪽) “20세기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모두 ‘과학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 자신의 순환논리에 의해 허위를 입증할 수 없었다. 과학주의는 합리적 주장을 통해 정립될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선전을 위한 세 가지 도구에 의존했다. 잔인한 폭력, 비판자에 대한 모욕 그리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약속. 모든 전체주의 체제가 이것과 똑같은 도구를 사용했다.” (99쪽) ‘당신은 백신 반대자인가?’라는 어리석은 질문 팬데믹 기간 동안 백신의 안정성과 코로나 대응조치에 대해 어떤 반대나 의문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면 많은 경우, 코비드 부인자, 백신 반대자(거부자), 음로론자로 낙인찍혔다. 자연면역을 인정해 달라며 ‘백신 의무 접종’에 관한 소송을 낸 케리아티에게 사람들은 ‘당신은 백신 반대자’냐고 묻는다. 그는 그와 같은 질문이 ‘당신은 약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같은 질문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어떤 약을 어떤 환자 혹은 환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 그리고 어떤 적응증에 쓴다는 말인가.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그런 약이나 백신은 결코 없다.”(209쪽) 백신의 안정성에 의구심을 품었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백신 접종 후 부작용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상당수 있다. 그들이 백신 반대자면 애당초 왜 백신을 접종했겠는가. 지시를 충실히 따르고도 피해를 입게 된 상황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등의 근본적인 문제는 감추고, 자신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당한 혐의를 씌어 매도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인 것이다. 필연론과 운명론을 넘어 공동의 노력과 연대로 케리아티는 지구적 문제에 대한 공동의 대응을 내세우는 WHO(세계보건기구), WEF(세계경제포럼, 다보스포럼) 같은 국제기구가 거대 기업과 특정 재단으로부터 엄청난 자본을 지원받으며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을 폭로한다. 나아가 그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개혁 등 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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