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잔인하게 아름다운 제주도 여행기
시극 <깨진밤>을 통해 시와 희곡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관통해나가며 언어적 긴장이 살아있는 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던 극작가 김정현의 첫 번째 산문집.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당신’을 육지에 남겨두고 떠나온 제주도에서 그는 줄곧 여행자 또는 이방인의 눈빛으로 세계를 탐구한다. 단순한 일상의 공간도 그의 눈빛을 통해서는 오직 섬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특별한 ‘무엇’으로 바뀐다. 그 ‘무엇’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대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진중하지만 조금은 엉뚱한’ 후배와 함께 떠난 제주도에서 그는 끈질기게 사랑을 갈구하고 탐구하거나 절망한다. 그렇게 세계의 끝으로 가는 여행 속에서 그는 시적인 언어로 그 순간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한다. 이제껏 누구도 쓰지 못한, 누구도 읽지 못한, 전혀 다른 색깔의 언어로, 그는 이제 독자라는 공항 앞에 섰다.
시월이 지나면
당신의 눈빛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
작은 새의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부리처럼
희미한 통증은
당신의 검은 눈동자를 하루하루 쪼아대고
오늘은 또 얼마큼 두 눈이 멀었나
안경을 새로 바꿔도
당신의 아픔만큼은 절대로 보이지 않고
오늘은 단출한 식탁 위에서
슬픔을 먹어야겠다
- <세계의 끝으로 가는 여행> 프롤로그 전문
여행의 시작
언어는 세계를 가장 이해하기 쉽게 매개하여 주는 도구다. 인간에게 세계는 너무나도 광활하며, 그래서 그 끝을 알 수 없고, 몹시 두려운 어떤 것이다. 그것을 인간이 정해놓은 기호체계로 의식화해놓은 것이 바로 언어다. 시와 희곡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돌파해나가며 묘한 언어적 쾌감을 선사했던 <깨진밤>의 작가 김정현은 이번 그의 첫 산문집에서도 마찬가지로 언어적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담담하면서도 시적인, 아름다운 언어들을 풀어놓는다. 그래서 <세계의 끝으로 떠나는 여행>은 어쩌면 언어적 실험을 통해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려는 그의 노력의 순간들로 떠나는 여행이 된다. ‘진중하면서도 엉뚱한’ 후배와 떠난 제주도 여행은 처음부터 담담하고 차분하게 묘사될 뿐이지만, 그 언어들은 잔인할 정도로 아름답다. 여행을 하며 작가는 줄곧 ‘당신’을 떠올리지만, 당신의 존재는 세계의 끝에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제주도라는 친숙하면서도 낯선 여행지에서 작가는 단순한 일상의 공간마저 그리우면서 아프고, 뜨거우면서도 절망스럽게 그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