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온몸으로 도착하고, 언어로 돌아서는 ‘문정희’라는 세계의 회전문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갱신하며 언어에 새겨진 국경을 지우고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시인 문정희의 신작 시집 『그 끝은 몰라도 돼』가 아침달 시집 마흔다섯 번째로 출간되었다. 스웨덴 하뤼 마르틴손 재단이 수여하는 시카다(Cikada) 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며 자신의 세계를 그려온 시인은 안주하거나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유랑하는 언어의 도발적인 힘을 또 한 번 구현한다. 이번 시집은 그동안 시인이 그려온 지도가 세밀해지는 현장이자 사랑으로 흔들어 깨우는 우리 존재에 대한 새로운 부름처럼 느껴진다. 1부에서는 주소 불명으로서의 사랑을 탐색하며, 자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사랑,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사랑에게로 향해간다. 그동안 시인이 탐색해온 사랑과 이번 시집에서의 사랑이 다른 것이 있다면 다시 맨 처음으로 돌려놓는 듯한 전환기에서의 사랑이 그려지는 것이다. “골목 빈터에 첫 물방울처럼 떨어”(「문 플라워」)지듯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사랑의 환상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아쇠”(「실연」)처럼 ‘나’를 겨누어 흔든다. 2부에서는 그렇게 겨누었던 ‘나’의 원시적 감각으로 세계와 전면전을 펼치며, 세상에 보이지 않던 음각을 읽어나간다. “시는 충동이자 충돌”(「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어요」)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증언하며 끊임없이 새롭고 예리한 언어를 갈구하는 시인은 “나는 내 길을 가고 있어/ 그게 내 권력이”(「몸에 털이 난 아침」)라고 솔직한 언어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나아가게 만들 새로운 힘으로 환원한다. 자신을 깨우는 것이 무엇인지, 살아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시인은 ‘되어감’의 문법으로 세계와 다시 불화하고 충돌하며, 언어를 스스로 되찾는다. 그리하여 “미완성이어서 더 절박하고/ 주소가 없어 더 애절한” 시가 되어간다. 3부는 시인의 지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지명이 등장한다. 머물렀던 날의 단상에 그치지 않고, 언어의 매혹을 발견하였던 찰나가 명징하게 맺혀 있는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의 호흡을 따라 발자취를 옮겨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는 곳에 도착했다가 또 그곳을 떠나게 된다. 세계의 내부를 뒤흔들며 ‘나’를 깨우는 일에서 ‘세계’를 깨우는 일로 번져나가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 사랑의 언어를 숙명처럼 껴안은 오직 무한한 상처 박물관 시인 유희경은 시집 제목과 동명의 발문을 통해 이번 시집을 “사랑. 오직 사랑뿐이”라고 정의내린다. “미래의 언어가 시인의 임무라면, 사랑의 언어는 시인의 운명이”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의 운명을 끌어안고 사랑에 투신해온 시인의 세계를 다층적으로 이야기한다. 불우와 불구를 외면하지 않는 존재이자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의 언어를 선물하는 태양신의 눈이 멀 듯한 광채를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타들어 가는 어둠을 힘껏 끌어안는” 존재로 시인 문정희를 읽어내는 발문에서는 시인이 지니고 있는 언어적 힘에 대한 근원적 탐구와, 그 힘이 내비치는 참된 시인의 의미를 헤아리며 이번 시집을 읽어나간다. 침묵 대신 일침으로, 비밀 대신 솔직함으로 변장하지 않은 언어를 통해 자신의 길을 개척해온 시인 문정희는, 이번 시집을 통해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신의 방향에 실체감을 더하고 몸을 부여하기도 한다. 매혹의 지도 속에는 서로 엇갈린 길도 있지만 마주친 길도 많다. 그래서 시인이 만난 시인들의 목소리가 현장감 있게 담겨 있기도 하다. 사랑을 근거로 되묻는 시 안의 모든 물음은, 독자들과 함께 끝을 모르고 시작할 줄 아는 언어의 한계를 벗어 나가자는 일종의 제안이기도 하다. 흔들어 깨운 사랑 너머의 존재들과 “언어의 감옥에서 늘 탈옥을 꿈꾸는 수형자”로서의 ‘시인’의 존재를 함께 일깨운다. “우린 그냥 사랑을 숨 쉬는 잎사귀”(「벌새 가지 마」)이면서도 동시에 “이슬보다 땀이 더 뜨거우면 안”(「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어요」)되는 존재. 시인 유희경의 발문처럼 “사랑 받기가 아니라 사랑하기”를 끝내 실천하는 사람. “때로 신과 대결할 수도 있는”(「사랑과 음식」)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시인은 규정된 언어와 불화하며 세계에 맞서 들끓는 힘으로 세계를 끌어안는다. 그리하여 시집 『그 끝은 몰라도 돼』는 매혹적인 존재로서 서로 사랑하고, 사랑하는 존재로서 이끌릴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시 독자들을 흔들어 깨우는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