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순간을 마주한 사람들의 곁에서
보폭을 맞추어 걷는 마음
“비어 있는 손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007년 창비장편소설상과 문학수첩작가상을 나란히 수상하며 등단과 동시에 주목받은 서유미 작가의 『보내는 마음』이 출간되었다.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18년 만에 선보이는 첫 짧은 소설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젊은 여성들의 초상을 경쾌하면서도 핍진하게 그려 사랑받은 서유미 작가는 점차 다양한 주제, 폭넓은 세대로 시야를 확장하며 작품 세계를 갱신해왔다. 돌봄의 고단함, 연인과의 이별, 직장 동료나 이웃과의 갈등처럼 누구나 일상에서 마주할 법한 상처를 보듬는 이야기들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평범한 사람들이 지닌 보통의 마음을 그린
일상의 세밀화
극적인 사건이나 과장된 서사, 예외적인 인물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삶의 세목을 정교하게 그려내는 서유미 작가의 소설은 일상의 세밀화라 할 만하다. 작가가 담백하지만 신중한 필치로 포착하는 ‘일상성’은 우리에게 친숙하면서도 분명 눈길을 끌 만큼 남다른 데가 있다. 여기 실린 열두 편의 소설에는 ‘무너지고’(「무너지는 순간」), ‘변해가며’(「변해가는 것들」), ‘헤어지는’(「지금은 우리가 헤어져도」) 순간들이 담겼다. 그러나 서유미 작가는 누군가는 되돌릴 수 없다고 단념하는 마음을 그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사이’에 쉴 공간을 숨겨두고(「숲과 호수 사이」), 가만히 ‘기댈’ 곳을 마련해주며(「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서로 ‘닮아가는’ 얼굴들(「닮아가는 사람들」)을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본다.
호수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잔잔히 펼쳐진 물을 보며 어떤 기분과 감정을 흘려보내곤 했다. 의도하거나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모와 윤은 지치고 마음이 다쳤을 때마다 그곳에 갔다. 그 카페의 창을 통해 사계절의 풍경을 보았다는 건 계절마다 마음 다치는 일들이 생겼다는 뜻인 동시에 거기 앉아 있던 시간 덕분에 일상으로 돌아올 힘을 얻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_「숲과 호수 사이」에서, 62쪽
세상은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에 끼어 있지만”(「숲과 호수 사이」) 서유미 작가는 부서지기 쉬운 일상의 균열을 숨 쉴 수 있는 작은 틈새로 전환시킨다. 덕분에 그의 인물들은 “지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무더운 계절에도 잠시 심호흡을 하고 “여름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를 얻는다(「어떤 여름」).
다친 감정을 돌보고
내면의 상처를 회복하는 이야기
이번 소설집에서는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감정을 둘러싼 탐구와 더불어, ‘돌봄’에 대한 통찰이 각별히 빛난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여성이 육아 도우미에게 느끼는 애틋함, 각자 ‘엄마’와 ‘딸’에게는 받지 못했던 따스한 감정을 나누는 조카와 이모할머니, 길고양이를 돌보고 서로의 건강을 챙기는 오랜 친구 사이 등 오늘의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돌봄의 양상을 세심히 살핀다.
의지할 것 없는 세계에서 무어라도 부여잡고 고요히 자신을 끌어안은 사람들. 많은 것을 잃었지만 다 잃지 않은 사람들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이곳에 할머니의 사진이 걸린다면 어떤 모습, 어떤 표정일까. 인정은 분명 그 사진 앞에 오래 서 있을 것이다.
_「보내는 마음」에서, 196~197쪽
『보내는 마음』 속 소설들은 사람은 누군가를 돌보고, 또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담담히 일깨워준다. 소설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작품 속 인물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은 감정을 느끼고, 그러면서 도리어 위로받는 경험에 이르게 된다. 서유미 작가가 행간에 숨겨둔 다정하지도, 무정하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의 위로들은 독자에게 살며시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불어넣는다.
곁에 없는 엄마와 할머니의 얼굴을 생각했다. 자신을 지탱해준 사람들과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세계에 대해. 많은 일이 일어나고 지나간 뒤에도 울지 않던 얼굴에 대해. 혹은 실컷 울고 난 뒤 말갛게 된 얼굴에 대해. 가깝다고 다정한 것도 아니고 멀리 있다고 무정한 것도 아니었다. 인정은 비가 내리는 창 너머의 세계와 창 안의 젖지 않은 테이블,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보았다.
비어 있는 손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인정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_「보내는 마음」에서, 198~1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