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우리는 무지개를 본 적 없지만 무지개를 알아요.”
당신은 한없이 문학적이고 순수하며 슬프지만
동화 같은 시간을 제게 선물해 주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제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제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시각장애인이 말하고 김숨이 쓴 다섯 편의 연작소설
시각 중심의 관점으로는 결코 닿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
김숨 작가의 신작 소설 『무지개 눈』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무지개 눈』은 다섯 명의 시각장애인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단편소설을 엮은 연작소설집이다.
김숨은 한국문학의 ‘오늘’을 만들어 왔고, 또 여전히 만들어 가고 있는 독보적인 작가이다. 1997년 등단한 이후 28년간 스무 권 이상의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발표하며 쉼 없이 소설을 써 온 김숨 작가는 그 문학적 성과를 꾸준히 인정받아 2010년 이후로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한국의 주요 문학상을 모두 석권했다.
김숨은 역사적 사건에 연루된 실제 인물들의 삶과 내면을 소설로 기록하고 증언하는 데 오랫동안 몰두해 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1987년 6월 항쟁 운동가와 목격자, 한국전쟁 생존자와 유족 들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듣고 소설을 쓰며 ‘역사와 개인’의 관계, ‘기록과 문학’의 접점을 새로이 만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런 김숨이 이번에 찾아가 귀 기울인 이들은 바로 시각장애인이다.
지금의 현대 사회는 점점 더 매끄러운 침묵으로 가득해지고 있다. 수많은 사회적 소통이 사람과 사물을 직접 대면하는 방식에서 터치스크린 속 영상이나 이미지로 빠르게 전환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지개 눈』은 이토록 매끄러운 침묵 앞에 좌절하면서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체득해 살아가는 시각장애인들의 삶을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선천성 전맹인, 저시력에서 후천성 전맹이 된 시각장애인, 선천성 저시력, 전맹과 지체장애를 가진 중복장애인 등. 이들은 소설마다 한 명의 화자로 등장해 자신의 감정을 직접 말하거나 기억을 ‘보여 준다’.
소설은 화자의 기억과 감정에 따라 시, 희곡, 독백을 넘나드는 형식에 이어 점자, 볼드체, 기울임체 등의 효과로 그 감각을 생생히 전한다. 이토록 다채로운 형식의 이야기 조각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이 각각의 형식이야말로 이들이 느낀 가장 진실한 감정이자 순도 높은 기억 그 자체에 닿기 위해 김숨이 공들여 만든 ‘낯선’ 감각의 토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토록 생생한 감각을 통해 김숨은 막연한 상상 속 시각장애인의 삶, 그 편견과 선입견 너머로 우리를 이끈다. 그곳은 김숨이 작가의 말을 통해 “당신은 눈먼 제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제게 보여 주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시각 중심의 관점으로는 절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이다. 오직 어둠뿐이라 상상했던 그곳에서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생의 감각과 기쁨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뜬다. 사랑하는 이들의 살냄새, 영원히 잊히지 않을 목소리, 길을 잃을 때마다 마치 ‘나를 위해 예비한 듯’ 도움을 내미는 익명의 손길로 삶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눈을.
■ ‘보다’의 확장 ― 시각 중심적 편견을 넘어
『무지개 눈』의 인물들은 ‘본다’. 특수학교에서 만난 또래 전맹인 언니가 “너 밥 먹는 거 보니까 숟가락으로 먹더라. 우리는 사람들을 못 보지만 사람들은 우리를 봐.”(26쪽)라고 말하듯이, 그리고 전맹인 친구가 또 다른 친구의 새를 이야기하며 “파, 우린 도의 새를 봤어.”(198쪽)라고 말하듯이. “빛조차 본 적 없는” 전맹인의 “봤어.”라는 말 앞에 우리는 거듭 멈칫하게 된다. 이 멈칫거림은 무엇일까?
‘보다’는 사전적 의미로만 해도 ‘눈으로 대상을 아는 것’을 포함해 읽고, 주변을 살피고, 만나고, 보살피고, 형편을 헤아리고, 예측하고, 일을 하고, 관계를 맺고, 맛을 보는 등 무수히 많은 상황에 사용된다. 그럼에도 전맹인이 말하는 ‘보다’ 앞에서 우리가 주춤하며 그 의미를 돌아보게 되는 이유는 ‘보다’라는 단어 자체가 품은 시각 중심적 전제, 그리고 그 말을 시각 중심적으로 사용해 온 오랜 편견 때문이다.
김숨은 이 단어를 다른 말로 바꾸거나 거듭 설명하지 않고, 이들의 ‘보다’를 그저 보여 준다. 우리는 멈칫거리거나 고민하며, 때로는 즐거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김숨이 제시하는 이 담담한 ‘보다’가 지시하는 무수한 광경을 ‘본다’. 보이지 않는 채로 읽고, 주변을 살피고, 누군가를 만나고, 보살피고, 예측하고, 일을 하고, 관계를 맺으며 우리가 몰랐던 ‘보다’를 새로이 마주한다.
■ 시각장애의 스펙트럼 ― 차이와 연결
우리가 정체성과 연대에 대해 말할 때 각각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지하지 않고는 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장애 또한 그렇다. 『무지개 눈』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다양성과 차이를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보여 준다. 어린 두 아이를 키우는 전맹인 여성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오늘 밤 내 아이들은 새장을 찾아 떠날 거예요」, 시각장애인 특수학교 영어 교사가 아이들에게 사물의 영어 이름을 가르치며 과거에 눈으로 보았던 것들을 떠올리는 「파도를 만지는 남자」, 전맹이자 지체장애인 여성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끝없이 노래하듯 말하는 「빨간 집에 사는 소녀」, 전맹인 안마사가 기타를 연주하듯 타인의 몸을 손끝으로 읽는 「검은 양말을 신은 기타리스트」, 안구진탕증과 선천성 저시력을 앓는 청년이 도시에서 길을 잃고 헤매며 친구들을 떠올리는 「무지개 눈」까지.
소설 속 화자들의 삶은 독립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책을 다 읽고 돌아보면 마치 신비로운 여러 개의 끈이 이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학교에서, 거리에서, 직장에서 누군가와 주고받았던 돌봄의 손길, 호기심에 귀를 크게 열고 들었던 모르는 사람의 작은 웃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나누려는 다정한 목소리 속에 깃들어 서로의 삶에 천사처럼 잠시 다녀간 듯이.
■ 김숨의 형식 ― 문학의 윤리적 가능성
김숨 소설이 보여 주는 끝없는 새로움은 지치지 않는 윤리적 가능성의 탐구에 닿아 있다. 실제 사건과 인물을 다루는 김숨의 소설 쓰기에서 윤리적 고민은 취재 과정에서부터 지면 위에 활자로 새겨지는 모든 순간까지 이어진다. 특히 소설의 형식은 김숨이 가장 고민하고 실험한 요소이다. 김숨은 소설의 전통적 형식을 적극적으로 해체하고 접붙이며 화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는 소설의 형식을 작품마다 선보여 왔다.
『무지개 눈』의 소설들은 일인칭과 삼인칭을 서슴없이 오가고, 시와 희곡의 구성도 자연스럽게 차용한다. 이러한 형식은 독자가 익숙한 방식으로 화자의 삶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대신, 화자의 말을 끝까지 믿고 경청할 수밖에 없도록 이끄는 장치가 된다. 그래서 김숨 소설 속 인물들은 한눈에 드러나지 않는다. 삶의 진실된 형태가 그러하듯, 오직 소설 전체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낯섦. 저는 그것을 소설을 쓸 때 목숨처럼 여깁니다.”라고 김숨 작가가 직접 밝힌 말처럼, 김숨의 인물들은 끝내 온전한 개인, 그 낯설고 진실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