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만화의 거장 박순찬,
불의와 폭력으로 점철된 대통령의 ‘내란본색’을 기록하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대국민 긴급 담화(2024. 12. 3.) 중에서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27분, 윤석열 대통령이 기습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반국가 세력의 대한민국 체제 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6시간 만에 공식 해제되었지만, 그 후폭풍은 사건의 진위가 밝혀짐에 따라 날이 갈수록 덩치를 불려가고 있다. 이제 윤석열 대통령의 12·3 내란은 독재정권과 일제의 강압통치 시절을 그리워하는 한국 엘리트층의 본색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으로 진화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는 충동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권력을 위해 철저히 준비된 내란이었음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자 보수 세력의 편에 섰고, 군사정권의 사고방식을 펼치며 자신의 측근을 대거 등용했다. 측근이 자행하는 불법 행위에는 눈을 감았으며, ‘반국가 세력’이라는 이념을 내세워 지지자와 적을 규정했다. 끝내는 본인의 제왕적 권력을 위해 군 세력과 결탁해 내란을 일으켰다. 계엄이 해제된 지 두 달이 넘었지만, 윤석열의 ‘내란본색’은 현재진행형이다. 정당한 계엄임을 주장하며 국민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자신의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며 내란의 의지를 계속해서 불태우는 윤석열의 말 이면에서는 파시즘적인 권력에 대한 갈망이 읽힌다. ‘풍자만화 속 정치인의 얼굴은 정치인 개인의 생김새가 아니라 각종 매체를 통해 공개되는 공적 활동을 묘사하는 것’이라는 원칙 아래 박순찬 작가가 묘사한 윤석열의 얼굴에서 과거 독재정권의 망령이 엿보이는 이유다.
부조리와 모순이 가득한 비극적 현실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와중에도 시민들은 촛불에 이어 응원봉을 들고 광장에 모여 행동에 나섰다. 분노를 해학과 웃음으로 표현하며 국가의 폭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어찌 보면 권력의 허울을 유머와 풍자로 벗겨내는 시사만화와 결을 같이한다. 30년 동안 끊임없는 작품 활동으로 격동의 대한민국을 기록한 시사만화의 거장, 박순찬 작가가 『도리도리』와 『용산대형』에 이어 마지막으로 치닫는 윤석열 정권의 면면을 낱낱이 기록한 카툰집 『내란본색』으로 돌아왔다.
비상계엄부터 탄핵 심판까지, 대통령의 ‘최후의 격노’
‘내란 부역자들’의 실명을 기록하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에는 시사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장도리 연속극’을 배치해 주요한 사건을 대입해 볼 수 있도록 했다. ‘장도리 연속극’은 4컷 만화의 완성도는 살리면서, 각개의 사건들이 연결되는 새로운 형식의 시트콤 만화로 현실에서 전개되는 사건 사고와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이 만나 탄생한 ‘팩션(faction)’ 작품이다. 촌철살인의 만평으로 읽을 수도, 아예 새로운 장르물로 읽을 수도 있다. 『내란본색』에서는 ‘최후의 격노’, ‘왕짜의 게임’ 시리즈를 실었다. 뒷부분에는 한 컷의 만평으로 구성된 ‘장도리 만평’을 시간 순서에 맞추어 3개의 장으로 나눠 실었다. 시사만화는 그 특성상 그려질 당시의 사건 맥락을 모르면 그 의의가 떨어지는 한계가 있다. 이를 보완하고 읽는 재미를 더하기 위해 이 책에서는 작가의 설명을 함께 달아 당시 상황을 속도감 있게 되짚고, 다양한 각도로 과거를 조망해볼 수 있게끔 했다.
1장 ‘대파 총선’에서는 2024년 총선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의 방송 및 언론 장악 과정과 집권 여당을 위시한 권력 투쟁을 담았다. 2024년 총선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대파 한 단에 875원이면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발언은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고, 여당은 처참한 총선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다. 2장 ‘거부의 시대’에서는 ‘격노’와 ‘거부’로 점철된 용산정권의 민낯과 선거 브로커 명태균이 정치권에 일으킨 파장을 기록한다. 윤석열 정부 시기 행사된 거부권은 총 25회로, 19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최다 기록을 경신했다. 3장 ‘계엄령’에서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부터 체포, 탄핵 심판의 과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시시각각 안면을 바꾸는 내란 세력의 모순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담았다.
특별 부록 ‘내란의 부역자들’에서는 내란에 적극적으로 협조 및 방기한 인물들을 낱낱이 소개한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안건으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방조한 10명의 국무위원, 2024년 12월 7일 탄핵소추안 표결에 불참한 국민의힘 의원 105명, 2025년 1월 6일 내란 우두머리 체포영장 집행을 저지한 국민의힘 의원 45명은 물론, 내란을 옹호하는 망언을 일삼은 이들의 실명을 모두 공개했다.
제왕적 권력을 손에 넣고자 걸어온 행보
‘대통령의 본색’을 담은 강렬한 표지화
장도리 카툰집 시리즈의 매력 중 하나는 박순찬 작가가 선보이는 강렬한 표지화다. 『내란본색』에서는 ‘내란 우두머리’를 포함한 윤석열 대통령의 여러 키워드를 응축해 묘사한다. 커다란 양주병으로 표현된 머리, 王 자가 새겨진 손바닥 모양의 라벨, 술병을 둘러싼 총의 모습에서 12‧3 내란의 징후와 제왕적 권력을 손에 넣고자 한 윤석열의 본색을 읽어낼 수 있다. 그간 윤석열의 얼굴은 정치적 입장과 상황에 따라 손바닥을 뒤집듯 시시각각 바뀌어왔다. 정권 말기, 마침내 그가 도착한 최후의 얼굴은 어떠한 모습일까? 선글라스를 쓰고 굳게 입을 다문 모습으로 묘사된 그의 옆얼굴에서 우리는 익숙한 독재자의 얼굴 몇을 겹쳐 본다.
12월 3일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이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암울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러나 시민들은 다시 한번 광장으로 나와 뜨거운 빛의 물결을 만들고 있다. 정치적, 사회적 모순에 좌절하는 대신 웃음과 해학으로 부당한 권력에 저항한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그 웃음 속에 들어 있다. 『내란본색』은 그 과정에서 불의와 폭력의 역사를 기록하고, 분노한 독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탤 것이다. 구시대의 잔재를 떨쳐내고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일이 시민의 몫이라면, 유머와 풍자로 부조리한 세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독자로 하여금 미래를 생각할 힘을 주는 것은 시사만화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