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근대 도시는 어떻게 장애인을 억압했는가? “장애”의 관점으로 “지리학”을 사유하다 이동의 제한, 배제와 소외의 메커니즘 장애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운 일 중 하나는 공간적 이동이다. 장애인들은 교통수단의 이용이나 접근성의 한계로 인해 이동 자체가 힘들 뿐 아니라 외부활동이 제한되면서 열악한 주거 장소에 머물게 된다. 이에 따라 경제활동이 사회적으로 제한되고, 문화적 장소나 자연환경을 방문하여 사회적 참여나 여가 활동을 영위하는 데 많은 제약을 받는다. 이러한 이동의 한계는 장애인들이 사회적 배제와 소외를 겪는 대표적 취약계층이 되도록 한다. 이처럼 장애인들의 공간적 이동을 포함한 지리적 문제는 이들의 일상에서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사회공간적 포용/배제의 문제에서 매우 주요한 논제임에도 불구하고, 지리학이나 도시계획학, 사회복지학, 그 외 장애인 복지에 관심을 가지는 사회과학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물론 그동안 장애인들의 공간적, 지리적 문제들에 관한 연구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지만 대부분의 연구들이 경험적 연구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이를 연구할 수 있는 사회이론적 토대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브렌던 글리슨이 저술한 『장애의 지리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책은 공간, 장소, 이동성 등과 관련된 지리적 문제들이 장애인들의 경험을 어떻게 제한 또는 억압하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지리학이 1980년대 이후 실증주의적 방법론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회이론에 기반을 두고 사회 규범적 또는 참여적 주제를 다루게 되면서, 장애인들을 포함하여 사회적 취약집단들에 관한 관심이 대두되었고 그 결과 1990년대 후반 상당한 연구성과들이 발표되었다. 글리슨의 『장애의 지리학』은 이러한 연구 분위기 속에서 출간된 대표적 저서 가운데 하나이다. ‘장애의 지리학’을 창시한 사회학/지리학의 고전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장애의 지리학’은 지리학 전공분야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고, 이 책뿐 아니라 다른 여러 지리학자들과 관련 분야 연구자들의 저서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공간의 생산과 체현에 관한 연구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서구 사회에서 장애에 관한 이론적, 정책적 논쟁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이 책은 장애의 지리에 관한 탄탄한 이론적 체계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광범위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 분석하고 있으며, 또한 현대 서구 사회에서 시행되는 정책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책이 지리학 연구에 기여한 바는 여러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이 책은 장애에 관한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대안적인 사회과학적 이론 또는 모형을 개발하고자 한다. 글리슨이 장애의 지리학을 위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대안적 이론은 세계적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의 ‘역사지리적 유물론’이다. 사실 ‘역사(지리)적 유물론’은 서구 사회에서는 진보적 사회과학 연구에서 흔히 논의되기도 하지만 지리학, 특히 장애의 지리학에서는 상당히 생소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글리슨은 이러한 ‘역사지리적 유물론’에 기반을 둔 접근이 개인이나 공동체, 기관이 구조적 조건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으면서 독특한 사회공간을 생산하는가, 그리고 이로 인해 장애인들이 어떻게 사회적, 공간적으로 배제되는가를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이 책은 ‘역사지리적 유물론’의 주요 개념을 구성하는 르페브르의 ‘공간의 생산’ 개념에 기반을 두고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어떻게 장애인들에게 불리한 공간을 생산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장애인들의 생애에 자본주의가 미친 영향을 분석하기 위하여 장애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의 구조화와 차별화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그동안 역사적 통설이라고 알려진 견해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한편, 역사지리적 방법론에 기초한 경험적 사례 분석을 제시하는 것이다. 셋째, 이 책이 가지는 또 다른 유의성은 자본주의 도시의 장애 억압을 분석하고 탈장애 공간을 위한 정책적 제안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 자본주의 도시에서 ‘장애 억압’은 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직면하는 물리적 제약뿐 아니라 노동시장에서의 배제와 빈곤, 사회문화적 가치절하, 사회공간적 주변화 등을 유발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장애 억압을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윤리적 원칙으로서 ‘탈장애의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탈장애의 정의란 물질적 수요의 충족과 더불어 문화적 역량 강화 및 주류 사회생활에 대한 참여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탈장애의 정의를 위하여 그동안 국가는 어떤 정책들을 마련하여 시행하고자 했는가를 비판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공간과 이동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인권후진국이라 불리는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의 이동권과 탈시설 문제는 최근 몇 년 사이에야 비로소 주목을 받고 있다. 『장애의 지리학』의 출간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의 일상생활과 이를 억압하는 사회공간구조에 관한 이론 구축 및 사례연구, 그리고 대안 제시에 탁월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보수적 담론과 이론으로 회귀 중인 서구 사회에서도 현대 도시의 장애 억압은 여전히 뜨거운 주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자본주의 도시에서 ‘탈장애의 정의’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목표임이 분명하다. 이 책의 출간이 공간적 억압으로부터 장애인들이 해방되고 ‘탈장애의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앞당기는 데 기여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