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무한한 의식의 세계를 언어로 형상화한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 헨리 제임스(1843~1916)
헨리 제임스는 시의 역사에서의 셰익스피어와 같이
소설의 역사에서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레이엄 그린
현대 영미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 작가, 19세기 심리적 리얼리즘 문학의 대표자 헨리 제임스의 단편선이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서른한 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마크 트웨인과 더불어 당대 미국 문단을 이끈 제임스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고자 했던 전통적인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복합적인 관점과 화법을 구사하여 인물들의 내밀한 심리를 포착한 작가였다. 그가 출현할 무렵의 작가들이 찰스 디킨스와 오노레 드 발자크,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 등 19세기 위대한 거장들에 의해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이 소설로 쓰였다고 불안감을 느끼던 상황에서 제임스의 텍스트는 소설의 무한성을 증명하는 하나의 이정표로 제시됐다. 그는 인상적인 광경, 단어 하나도 훌륭한 스토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으며, 파편적이고 무질서한 인간의 의식을 언어로 형상화한 그의 시도는 제임스 조이스, T. S. 엘리엇으로 이어져 후에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대표되는, 20세기 모더니즘의 시대를 열었다.
제임스의 아버지인 헨리 제임스 시니어는 스웨덴의 신비주의 사상가 스베덴보리를 연구한 학자이자 개방적인 교육관을 가졌던 인물로, 제임스가 생후 6개월 때부터 부모는 장남 윌리엄과 차남 헨리를 데리고 몇 달 동안 영국과 파리를 여행했다. 이후로 제임스는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생활 속에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면서 국제적 감각을 익히며 성장했다. 스물한 살 때 미국 잡지에 서평과 단편소설들을 기고하면서 본격적인 글쓰기 활동을 시작한 그는 서른셋 무렵 영국에 정착해 40년 가까이 그곳에서 살았고, 타계 1년 전 귀화하여 유럽인으로 생을 마쳤다.
유년 시절부터의 유럽 체험, 그리고 신비주의에 심취했던 아버지의 사상은 제임스 문학 세계를 형성하는 데 주요한 밑거름이 된 요인들이었다. 일생을 이방인으로 살아갔던 그는 문학 인생 전반에 걸쳐서 구세계(유럽)와 신세계(미국)의 충돌이라는 국제적 주제를 다루며 신구 문화의 갈등을 극복하는 더 나은 삶과 문명을 모색했다. 나아가 그는 ‘아메리칸 아담’이라 정의되는, 영웅적인 순진성과 잠재력을 갖춘 미국인의 정체성을 드러내 미국의 가능성을 발견해 내고자 했고, 후대의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이러한 제임스의 업적에 대해 “미국인의 정신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랠프 월도 에머슨, 월트 휘트먼 그리고 헨리 제임스, 이 세 작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라고 평했다.
제임스 문학의 대표적 한 축이 ‘국제주의 테마’였다면, 다른 한 축은 바로 개인의 내밀한 심리 드라마를 극대화시키는 ‘초자연적 테마’였다. 그의 아버지는 극심한 우울증이 동반된 정신질환을 겪고 난 뒤 영적 세계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자녀들의 삶과 지적 탐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작가의 형이자 저명한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다양성이라는 이름의 열린 태도로 ‘영적 현상’을 수용해 인간의 심리 작용을 분석했다면, 헨리 제임스는 소설에서 유령의 출현과 같은 현상을 통해 개인의 의식 내에서 벌어지는 소외 및 예민한 감수성, 망상, 신경쇠약, 죽음 등을 묘사해 냈다. 불안한 심리를 보이는 화자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제임스의 소설은 분열된 자아를 집중적으로 탐구한 프란츠 카프카 등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며, 시대의 변화와 독자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게 하는 그 다채로운 세계는 “양탄자의 무늬처럼 복합적이며 매혹적이다”(츠베탄 토도로프)라는 찬사를 받았다.
■ 이 책에 대하여
헨리 제임스는 50여 년에 걸친 작가 생활 동안 모두 112편의 중단편소설을 써냈으며, 단편소설을 ‘아름답고 축복받은 누벨’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큰 애정을 보였다.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서 정수로 꼽힐 만한 8편을 엄선하여 실은 이 책 『헨리 제임스』는 그동안 국내에서 단편적으로 다루어진 제임스 문학을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수록작 선정에 기준을 두었다. 문학적 의의와 재미뿐만 아니라 제임스 단편소설을 관통하는 3대 주제인 ‘정체성’ ‘유령’ ‘환상’을 한 권에서 아우르는 동시에, 리얼리즘에서 모더니즘으로 옮아가는 작풍의 변화를 좇을 수 있도록 시기별 주요 작품을 고루 뽑아 연대순으로 배치했다. 이렇게 최종 선정된 8편 가운데 「네 번의 만남」 「제자」 「중년」은 국내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며, 단권으로 출간된 바 있는 「데이지 밀러」와 「나사의 회전」을 함께 수록했다. 「데이지 밀러」(1878)와 「나사의 회전」(1898)은 각각 ‘국제주의 테마’와 ‘초자연적 테마’의 대표 걸작이기도 한데, 「데이지 밀러」는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씨』,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더불어 미국적 여성상을 대표하는 여주인공을 창조해 낸 소설로 꼽히며, 유령 소설의 모범이 되는 「나사의 회전」은 세계 문학사를 통틀어 「일리아드」 「오디세이」 「신곡」 「햄릿」을 제외한다면 영미권에서 가장 많은 논의가 이루어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 책 『헨리 제임스』는 작가가 최종적 가필을 가한 판본인, 찰스스크리브너사에서 발간한 뉴욕판 『헨리 제임스 전집』(전 24권, 1907~1909)을 저본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