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고종황제에 대한 편견을 과감히 버려라!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의 기분 좋은 재발견
그동안 유약한 이미지로만 그려졌던 고종황제를 전면적으로 재조명한 책. 베스트셀러 《이산 정조대왕》과 《이도 세종대왕》으로 대중 역사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저자는 이 책 《이경 고종황제》에서 고종황제를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인 영민한 군왕이자 이이제이의 외교 전략으로 열강의 노림수를 피하면서 국체를 보존한 노련한 승부사로 그려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국정의 주도권을 되찾고 근대국가로서 인프라를 차근차근 구축하는가 하면 열강의 틈바구니를 뚫고 자주국가로서 국체를 일신해가는 과정이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일제와 그들의 역사관에 오염되었던 고종황제가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그 비밀의 문을 열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왜 고종황제를 두려워하는가?
우리에게 고종황제는 어떤 인물인가? 또 그가 선포한 대한제국은 어떤 의미인가? 아마도 고종은 고집스런 대원군과 교활한 명성황후의 틈바구니에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인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존재로 각인되어 있지는 않은가?
일제는 조선을 강탈한 후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고종황제 왜곡에 나섰다. 그리하여 고종황제와 그의 충실한 신하들은 수구부패관료로 낙인 찍혔으며, 그가 이뤄낸 근대화의 성과들은 일본인과 친일파의 몫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고종황제와 그의 시대를 보는 이러한 시각이 해방 후 지금까지도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급기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외세의 침략 시도에 맞선 자주적 근대화 운동이었던 고종황제의 광무개혁을 송두리째 부정하는가 하면 대한제국을 시대에 뒤떨어진 전제국가로 폄훼하는 주장이 뉴라이트를 비롯한 사회 일각에서 버젓이 통용되고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들은 왜 고종황제 깎아내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가? 그들은 도대체 왜 고종황제를 두려워하는가? 이 책 《이경 고종황제》는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을 아우르며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를 헤쳐 나갔던 노련한 승부사인 고종황제의 진면목을 복원해 보여줌으로써 이에 대한 일말의 답을 던져준다.
고종황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편견을 버려라!
개화, 개방만이 살 길이다 |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열두 살의 나이로 준비 없이 왕위에 오른 고종. 그러나 조선을 통치하기에 그의 나이는 너무 어렸다. 이후 10년 동안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철통같은 쇄국정치가 이어졌다. 이윽고 1873년 흥선대원군을 교묘하게 일선에서 후퇴시킨 고종은 정치 일선에 나서고, 세계 각국과 소통함으로써 꽉 막혀있던 조선의 숨통을 틔웠다.
이이제이의 비책을 세우다 | 몰려드는 외세와 설익은 개화주의자, 그리고 변화에 저항하는 수구세력이 좌충우돌하면서 갑신정변과 임오군란, 갑오동학농민전쟁,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이어졌다. 혼란에 빠진 조선, 고뇌하는 고종! 그는 조선 땅에서 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거대한 힘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조정하면서 근대적 개혁과제를 추진할 틈을 만들어갔다.
극적인 승부수를 띄우다 | 일제가 명성황후 시해로 자충수를 둔 사이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좁은 틈새에서 본격적인 근대개혁에 나섰다.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개혁을 추진할 절대 권력을 장악한 고종은 경제.교육.언론.의료.군사.경찰.사법제도 등 다방면에서 폭넓은 개혁사업을 펼쳤다. 이름하여 광무개혁. 뿐만 아니라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신속히 이뤄진 전기, 통신, 우편, 철도 등의 근대적 인프라 구축과 워싱턴 DC를 모델로 한 서울 개조사업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리하여 사회 분위기는 일시에 활기를 띄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쳐흘렀다.
끈질긴 항일투쟁에 나서다 | 대한제국이 착착 근대국가로 변모해가는 모습에 당황한 일제는 급기야 직접적인 무력을 들고 나섰다. 러일전쟁을 일으켜 대한제국 강권의 기반을 다진 것이다. 이어 강제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국권을 찬탈한 일제에 대항에 고종은 대내적으로 암암리에 의병을 후원하는 한편 대외적으로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외교 노력을 펼쳤다. 일제의 살벌한 감시 속에서 그의 투쟁은 실로 눈물겹기까지 했다.
인간 이경의 고독과 희망
“황제가 유약하다는 사람들은 틀렸다.” 호머 헐버트의 말이다. 또 미국인 외교고문을 지낸 오웬 데니는 “황제께서는 재위 내내 위대한 국가의 지배자다운 강건함과 낙천성과 인내심을 보여주었다.”라고 증언한다. 이들의 평가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나운 흥선대원군의 호통에 웅크리고 있거나 간교한 명성황후의 치마폭에 휘감겨 있는 바보 같은 임금의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고종은 재위 내내 정치적으로 고독한 군주였다. 그러나 백성은 그를 사랑했다. 1919년 그가 죽자 수많은 백성이 거리로 나와 만세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이어진 상해 임시정부에서 그의 대한제국을 이은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의 고독은 그렇게 대한민국의 희망으로 이어졌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독립
그러나 2008년 대한민국은 때 아닌 ‘광복절 - 건국절’ 논쟁에 휩싸였다. 60주년을 맞는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된 탓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실질적인 근대국가의 탄생으로 보는 ‘건국절’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조선-대한제국-임시정부의 역사에서 동떨어져 나오게 된다. 반대로 일제 강점 시대와 미군정 시대는 각각 ‘그들’의 역사가 될 판이다.
무엇이 이런 주장을 가능하게 하는가? 단절된 역사의 복원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지금 이경 고종황제를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