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새로운 분배의 상상력에서 찾은 AI 시대의 해법 ‘개같이 일만 하라’고 강요하는 사회는 이제 그만!!!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은 오래된 편견일 뿐.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세상, 극도로 불평등한 이 ‘헬조선’을 언제까지 견뎌내야만 할까? 모두를 위한 소득 VS 모두를 위한 상속 모든 시민의 총소득을 늘리는 사회적 배당금인 ‘기본소득Basic Income’이든 지금 당장 실행 가능한 사회적 상속인 ‘기초자본Basic Capital’이든 고용 없는 저성장 시대에는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난 ‘모두를 위한 분배’가 답이다! “모두를 위한 소득은 ‘지속 가능한 소비력’이 여러분에게 실질적으로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줄 거라고 말합니다. 반면 모두를 위한 상속은 누구나 스스로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기회가 실질적인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만들 거라고 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지속 가능한 소비력’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원하십니까? 물론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이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한 세상입니다. 저는 머잖아 그런 세상이 분명 오리라고 믿습니다.” - 본문 중에서 ◆ ‘모두를 위한 소득’과 ‘모두를 위한 상속’이라는 21세기 분배제안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심각한 나라, 한쪽에서는 최저임금 1만 원을 놓고 여야와 노사가 치열하게 싸우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똘똘한 집 한 채’라는 유행어와 함께 ‘어디는 하루아침에 몇 억 올랐다더라’ 하는 소문이 다수를 극심한 박탈감과 좌절감에 빠뜨리는 나라, 한 번 실패하면 재기가 거의 불가능한 나라, 극소수의 자리를 놓고 모두가 미친 듯이 경쟁에 목매는 나라, 세계 11위의 GDP를 자랑하면서 실업자는 113만 명도 넘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870만 명에 달하며 결식 우려 아동이 무려 33만 명이나 되는 나라. 우리의 현실은 미래 세대들이 마음껏 자신의 장래를 꿈꾸기에는 너무 어둡기만 하다. 전체 구성원의 절대다수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이런 현실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건 나쁜 일이 아니야”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정치철학자가 있다. 이미 1990년대 말부터 기본소득과 기초자본이라는 새로운 분배 개념을 접한 저자 김만권은 당시만 해도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곧바로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일도 안 하고 소득을 받아가다니 그게 말이 돼? 사회가 상속을 해주면 그게 공산주의지! 제발 꿈 깨고 현실에서 철학 좀 해라.” 그런데 이제 수많은 사람이 기본소득을 요구하고 사회적 상속이 법안으로 제안되는 것을 보며 뭔가 평행우주 같은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저자의 고백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겪은 ‘상전벽해’의 한 단면일 것이다. 이후 2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정치철학을 가르치며 밥벌이를 하고 있는 김만권은 대학에서 늘 마주하는 어린 제자들의 고통과 절망에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면서 하루빨리 ‘헬조선’에서 벗어날 해법을 강구했다. 그러다 “낡은 서랍 속 반가운 편지처럼 기본소득과 기초자본이라는 발상을 꺼내들고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무료 강연을 열어 젊은이들과 소통하면서 이 두 분배제안이야말로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 조금 더 인간적인 사회를 짓기 위해 정말 필요한 시스템이라는 확신을 굳히게 되었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 - 21세기 분배의 상상력』은 그런 열망과 소통의 산물이다. ◆ 새로운 분배의 상상력은 노동 밖에서 시작된다! 20세기 중반까지 산업사회 시대의 중심에는 ‘노동’이 있었고 ‘일하는 사람’이 우대받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력이야말로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는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모름지기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면 번듯한 직장에서 얼마나 많은 연봉을 받으며 일하느냐가 관건이었다(안타깝게도 그런 분위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나 탈산업 소비사회로 들어선 지금, 세상의 중심은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되었다. 더불어 점차 많은 분야의 일거리를 사람이 아닌 로봇들이 대체해가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다른 어느 국가보다 그 대체속도가 매우 빠른 게 현실이다. 알파고와 이세돌 기사가 벌인 세기의 대결에서 이세돌은 겨우 한 판 신승을 거두었고, 그 결과에 거의 모두가 놀라움(과 두려움)을 금치 못하던 게 엊그제 일이다. 말 그대로 ‘AI 시대’가 눈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빅 이벤트’였다. 세상은 이토록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데 ‘노동’을 대하는 우리의 감각은 여전히 20세기 에 머물러 있다. 2016년 세계경제포럼에서 “세계 일곱 살 아이들의 65%는 지금 없는 직업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발표가 나왔지만, “한국 학생들은 미래에 필요하지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하루에 15시간씩 공부하고 있다”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지적에서 우리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과연 우리 사회에 밝은 미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미래 세대의 절망은 결국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절박하게 일하고 싶어도, 목숨 걸고 입사시험 준비를 해도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서 언제까지 “열심히 공부해야 돼! 좋은 대학 들어가 좋은 직장 구해야 사람대접 받는 거야”라고 아이들을 내몰 것인가! 아이들은 이미 현실을 꿰뚫고 있다. 건물주 아니면 연예인이나 크리에이터가 장래희망 1순위 아닌가.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은 이미 설자리를 잃은 지 오래다. 여기 이런 ‘노동하는 자만이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전통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난 분배’가 있다. 이 새로운 분배는 말한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 넌 이 땅의 시민이잖아? 그 이유만으로도 넌 충분히 분배받을 자격이 있어!” 바로 ‘기본소득’과 ‘기초자본’이다. ◆ 기본소득: 모든 시민의 총소득을 늘리는 사회적 배당금 기본소득은 서울시와 성남시에서 ‘청년배당’의 형식으로 실험 중인 덕에 이제는 상당히 익숙한 발상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 두 정책은 기본소득이라고 부르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조건 없이, 현금으로”라는 원칙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핀란드는 2,000명에게 매월 560유로(약 74만 원)를 지급하는 실험을 하고 있고,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는 핀란드보다 그 규모가 두 배에 달하는 4,000명에게 1인당 연 1만 6,989캐나다달러(약 1,410만 원), 부부의 경우 2만 4,027캐나다달러(1,995만 원)를 3년 동안 지급하는 실험을 올해부터 시작했다. 이란은 2010년부터 매해 모든 국민에게 1만 6,400달러 정도 지급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아이슬란드,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브라질, 인도, 나미비아 등에서 국가나 지자체가 중심이 되어 기본소득을 실험하고 있거나 그 실험을 논의하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알래스카영구기금으로 보통 해마다 1,000달러에서 1,300달러가량(적을 때는 800달러, 많을 때는 2,000달러)이 개인에게 지급되고 있다. 한편 기본소득의 기원은 16세기 인물인 토머스 모어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비베스, 콩도르세, 푸리에, 밀, 러셀 등을 거쳐 콜과 미드, 토빈과 페츠먼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를 거쳐 꾸준히 설파되어왔다. 이미 빌 게이츠를 위시한 세계적 자본가들이 적극 지지하기 시작한 기본소득은 “각 개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현금을 지급함으로써 개인의 총소득을 늘려 지속 가능한 소비력을 주는 것”이 핵심이다. 지급대상이 부자인지 빈자인지, 일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사회에 기여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등은 전혀 따지지 않는다. 그냥 이 사회의 구성원이면 누구나 다 받을 수 있는 ‘소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