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 전투

앨리스테어 혼 ·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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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 전투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였다.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최소 70만 명의 사망자가 났다. 독일군이 먼저 시작한 전투의 목표는 프랑스군을 ‘말려 죽이는’ 것. 프랑스군의 병력과 물자를 엄청나게 소모시킨 후 서부전선을 돌파해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결전의 장소로 프랑스 북동부의 요새 도시 베르?窩? 선택되었다. 대포를 비롯한 물자와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독일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10개월 뒤 독일군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베르?瓦【? 물러났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흐름도 바뀌었다. 베르?瓦【?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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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머리말 감사의 말 - 1장 1870 운명의 해 2장 마른 전투의 영웅 조프르 3장 서부전선의 팔켄하인 4장 왜 베르?窩潔邂? 5장 참호 속의 병사들 6장 첫날 7장 돌파당한 방어선 8장 무너진 크레티앵 군단 9장 난공불락 두오몽 요새 점령 10장 베르?窩? 사수하라 11장 구원자 페탱 12장 베르?窩? 생명선 13장 독일의 잃어버린 기회 14장 불타오르는 지옥, 모르옴 15장 포탄 구덩이와 시체들의 땅 16장 전선과 후방 17장 공중전 시대가 열리다 18장 황태자는 왜 공격을 멈추지 못했나? 19장 프랑스 공격 정신의 화신, 니벨 20장 미친 소모전의 늪 21장 보 요새의 마지막 일주일 22장 벼랑 끝에 선 조프르 23장 동부전선이라는 변수 24장 독가스 공격과 죽음의 카니발 25장 한여름의 공방전 26장 최후의 대반격 27장 돌아온 페탱 28장 결말 없는 전쟁, 승자 없는 전투 - 에필로그 주요 참고문헌 참고문헌 주해 찾아보기

Description

“인류는 미쳤다!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면 미친 게 틀림없다. 이 학살극을 보라! 이 공포와 주검을 보라! …… 지옥도 이 정도로 끔찍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미쳤다!” _ 1916년 6월 베르됭에서 전사한 알프레드 주베르의 마지막 일기에서 10개월 동안 7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제1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가른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 303일의 기록 베르됭 전투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였다.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동안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최소 70만 명의 사망자가 났다. 독일군이 먼저 시작한 전투의 목표는 프랑스군을 ‘말려 죽이는’ 것. 프랑스군의 병력과 물자를 엄청나게 소모시킨 후 서부전선을 돌파해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결전의 장소로 프랑스 북동부의 요새 도시 베르됭이 선택되었다. 대포를 비롯한 물자와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독일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10개월 뒤 독일군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베르됭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흐름도 바뀌었다. 베르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베르됭 전투는 ‘참호전’의 전형이었다. 기관총과 대포 공격을 피하기 위해 병사들은 깊숙이 참호를 파고 들어갔고 물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진지에서 얼음물을 퍼내며 적진으로 진격하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극심한 허기와 갈증, 잠든 얼굴 위로 뛰어다니는 쥐와 벼룩, 이가 병사들을 괴롭혔다. 병사들은 말했다. “이곳은 지옥이다.” 베르됭 전투에서는 인간이 대포와 싸웠다. 돌파를 위해 달려 나간 보병들은 적군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쏟아지는 포탄에 무참히 쓰러졌다. 때로 아군 포대에서 쏜 포탄에 맞아 죽기도 했다. 급조된 참호 벽에 죽은 동료의 머리와 팔다리가 박혀 있었고, 포탄 구덩이에는 시체들이 떠다녔다. 베르됭 전투는 지휘관의 냉혹함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양측 지휘관 모두 병사들의 고통에 무감각했다. 독일군 참모총장 팔켄하인의 전략은 ‘말려 죽이기’였고,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의 신조는 ‘죽을 때까지 공격하기’였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물러나지 않고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 전략의 전부였다. 한 뼘의 땅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병사들을 지배했다. 결국 독일군과 프랑스군 모두 무수한 죽음을 양산했고 베르됭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 박살난 무기, 희게 변한 유골이 쌓인 ‘쓰레기 더미’가 되었다. 베르됭 전투의 실상을 총체적으로 밝힌 전쟁사의 고전 《베르됭 전투》는 소모전의 전형인 베르됭 전투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사건 전체를 살펴보는 통찰력 있는 역사서다. “베르됭 전투를 다룬 책 중 가장 중요한 책”,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책에서 저자 앨리스터 혼은 병사들이 남긴 일기와 편지, 지휘관들의 회고록, 신문과 잡지 기사, 독일과 프랑스의 공식 사료 등 관련 문헌은 물론이고 생존한 참전 군인들에게 직접 들은 증언까지, 다방면의 수많은 자료를 바탕 삼아 1916년의 베르됭을 그대로 되살려냈다. 저자는 무감각해질 정도로 만연한 죽음과 부상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병사들의 굳은 의지, 야전 지휘관들의 용기와 희생정신, 일기 변화, 병사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양국 군 지도부의 무능과 내부 갈등까지 전투의 성패를 가른 모든 요인들을 명료하게 정리해 보여준다. 그리하여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이 뚜렷이 우세했는데도 왜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 프랑스는 ‘인계에 펼쳐진 지옥’이라는 10개월의 전투 속에서 어떻게 베르됭을 지킬 수 있었는지, 그리고 왜 이 전투가 제1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꾼 전투라 불리는지,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알려준다. 1916년, 베르됭에서 벌어진 최악의 전투 1915년 말, 독일군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교착 상태를 풀고 승기를 잡기 위해 프랑스를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베르됭을 공격 지점으로 삼자고 제안하며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군은, 자발적으로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피를 남김없이 흘리고 죽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여러 차례 베르됭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는데, 특히 1870년의 프랑스-프로이센전쟁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다 독일에 함락된 베르됭은 프랑스의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프랑스를 ‘심판’하라 1916년 2월 21일, 독일군은 ‘심판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첫 공격을 개시했다. 독일군은 포격으로 기세등등하게 선공했다. 몇 시간 동안 폭우처럼 쏟아진 포탄 세례에 프랑스군의 철로는 모두 망가졌고 숲은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되었다. 독일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돌격부대를 보냈다. 전장을 지키던 프랑스군 병사들은 상부의 지휘도 없고 지원도 받지 못한 채로 밀려드는 독일군을 대적해야 했다. 프랑스군 제165연대가 곧바로 심각한 상황에 빠졌다. 포격에 참호 여럿이 완전히 사라졌고 소총의 총열은 먼지로 가득 차 쓸 수 없게 되었으며 수류탄과 탄창이 담긴 상자들은 잔해에 파묻혔다. 폭이 거의 800미터나 되는 전선의 한 구역에서 2개 소대가 전우들을 파내느라 녹초가 되었다. 이들이 독일군의 첫 번째 정찰대를 발견했을 때, 그 독일군 병사들은 겨우 약 9미터 밖에 있었다. …… 진지 두 곳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없이 점령되었고, 부아도몽 숲의 제1선 참호 전체가 곧 무너졌다. 동행한 독일군 기관총 분대들은 부리나케 움직여 노획한 무기를 차지했고, 산소 아세틸렌 토치를 든 병사들은 프랑스군의 남은 가시철조망을 잘랐다. …… 지휘관 들라플라스 대위는 정신이 나가 여단장 볼레 대령에게 이런 통신문을 보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6장 첫날(141쪽)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소모전 소모전은 승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적군의 전투력을 소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는 자칫하면 인명으로 인명을 소모해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는 위험을 초래하기도 한다. 베르됭 전투는 소모전의 전형이었다. 연합군은 ‘총알받이’가 될 병사의 수를 따져볼 때 연합군이 우세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양쪽이 한 사람씩 병력을 잃는 방법을 쓰면 결국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기계적으로 계산했다. 동맹군도 같은 전략으로 맞대응했다. 어느 독일 작가는 “마지막에 남은 독일군과 프랑스군 병사가 주머니칼이나 이빨, 손톱으로 서로 죽이려고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참호 밖으로 나올 때까지” 전투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베르됭 전투는 역사상 단위 면적당 사망자 수가 가장 높은 전투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얻었다. 베르됭 전투의 전체 사상자 수는 다양하게 추산되었다. 그 전쟁에서 인간의 생명은 결코 꼼꼼하게 집계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공식 전쟁사(1936년 출간)는 1916년 10개월 동안 베르됭에서 입은 손실을 37만 7,231명으로 잡는데 그중 16만 2,308명이 전사나 행방 불명이다. 반면 처칠의 《세계 위기(World Crisis)》(1929)를 바탕으로 한 계산은 46만 9천 명까지 높게 잡는다. 같은 기간 동안 독일군이 입은 손실은 가장 신뢰할 만한 수치에 따르면 대략 33만 7천 명이며(처칠은 37만 3천 명에 가깝다고 계산했다), 당대 독일군 명부에 따르면 사망과 행방 불명만 10만 명이 넘는다. 어떤 수치를 받아들이든 프랑스와 독일 양측 사상자를 합치면 70만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수가 된다. …… 유해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 28장 결말 없는 전쟁, 승자 없는 전투(519~520쪽) 참호, 병사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곳 1916년 2월 혹독한 겨울, 전투를 기다리며 병사들은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정신적 공포에 더해 참호의 열악한 환경이 병사들을 한 번 더 괴롭혔다. 참호는 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