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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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하나의 축제, 짧지만 강렬한 축제이다” 위대한 단순함과 대담한 색채 운명으로부터 모성을 해방시킨 현대적 여성화가 31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이후 미술계에 무시할 수 없는 족적을 남긴 독일 표현주의 화가 파울라 모더존 베커(1876~1907년)의 전기이다. 그녀는 당시 최신 화풍이던 외광파 화풍을 따르면서도 풍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위대한 단순함’이라는 자신의 모토에 따라 독특한 화풍을 개척했으며,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 미술을 현대로 끌어올렸다”는 평과 함께 독일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부부관계가 없는 결혼생활과 아이에 대한 갈망, 자신의 화풍에 대한 화단의 냉대 등으로 생전에는 말 그대로 ‘고난의 예술가’였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는 우리에게 두 가지 초상을 보여준다. 하나는 세상의 무관심과 냉대에 맞서 꿋꿋이 자신의 길에 전념한 당시 ‘예술가의 초상’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 혹은 아내이자 화가라는 입장에서 ‘모성’이라는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는 ‘여성의 초상’이다. 책은 이 여성화가의 두 모습을 그녀와 주변 사람들이 남긴 편지와 메모, 일기와 당시의 기록들을 참고하여 마치 눈앞에 보듯 생생하게 그려낸다. 저자인 라이너 슈탐은 예술의 도시 파리와 독일의 예술인 마을 보르프스베데를 중심으로, 1900년을 전후한 당시 예술인과 지식인의 사생활과 사유를 특유의 꼼꼼한 문체로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잡아낸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와 평생에 걸쳐 애정과 우정이 섞인 교우관계를 유지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내적인 고민 역시 들여다볼 수 있다. _세상의 무시에도 좌절하지 않은 낙천적인 화가 파울라 모더존 베커는 1876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비교적 유복한 가정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 때 영국의 찰스 고모 집에 머물며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896년부터 베를린 여성미술가협회에서 운영하는 미술학교에 들어가며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스케치 없이 바로 그리며, 사물을 투박하게 묘사하는 그녀 특유의 방식은 당시 화가들 사이에서는 무척 드문 방식이었고, 그 진가를 제대로 인정해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아버지의 퇴직 후 집에서의 원조는 수시로 불안해졌으며, 동료들도 선생들도, 심지어는 고향의 가족들조차 파울라의 그림에는 언제나 회의적이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책에서 파울라 베커는 늘 밝고 쾌활하며 활동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끊임없이 사람들과 어울렸으며, 토론을 즐기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다. 게다가 포기할 줄 모르는 노력파이기도 했다. 세상이 뭐라고 하건 그녀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넘치는 에너지로 언제나 모임을 선도해가는 사람, 무서울 정도로 엄청난 수의 습작들을 그려대는 화가, 이것이 주변 사람들이 파울라 베커에게 받는 첫인상이었다. 동시대의 여성화가 산네 브라위니에르의 편지나, 오틸리에 라일렌더, 프리츠 마켄젠의 회고는 그녀의 낙천적인 성격과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보다 결단성 있어 보이는 그 자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잠깐, 이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다, 주의!’라고 느끼게 만드는 현명한 갈색 눈빛 때문이었을까? …… 이 사람은 파울라 베커였다. …… 뭔가를 즐기기라도 하듯이 얼굴을 평면 위를 스치는 것처럼 들어 올렸는데, 그 얼굴에서 아주 색이 진하고 맑은 갈색 눈이 상대방을 향해 지혜롭고 명랑하게 반짝거렸다.” ― 산네 브라위니에르의 회고 _보르프스베데, 오토 모더존, 그리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95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보르프스베데파 미술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그리고 1898년에 브레멘 근교의 보르프스베데 예술인 마을에 정착하여 자신의 미술의 근거지로 삼는다. 이곳에서 그녀는 소박한 풍경화와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며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일구어나간다. 프리츠 마켄젠, 하인리히 포겔러, 카를 빈넨 등 시대를 앞서갔던 예술가들과, 1901년 그녀의 남편이 되는 오토 모더존 그리고 우정과 애정이 섞인 평생의 친구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만난 곳도 이곳이었다. 훗날 릴케의 부인이 되는 클라라 베스트호프 역시 이곳에서 만났다. 릴케와 파울라 베커 사이의 우정은 그녀의 평생을 두고 지속되었다. 때때로 소원해진 시기도 있었지만 각자 결혼을 하고 나서도(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결혼했다. 파울라가 오토 모더존과 약혼한 직후, 릴케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대체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릴케는 파울라를 “자신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여성”,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듣는 귀”, 인생의 길을 알려주는 ‘조언자’로 간주했다. “저녁이 되면, 당신의 곁에서 쉬고 싶습니다”라며 약혼에 대한 축시를 쓰면서도 파울라에 대한 그의 감정은 변함이 없었다. 훗날 로댕의 책을 쓰고 그림을 보는 안목이 성숙해진 이후에 릴케는 파울라 그림의 맹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여행 중에 특이한 색채를 발견할 때마다 그가 떠올리는 것은 시상이 아니라 파울라의 그림이었다. 파울라의 사후에도 그리운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는 ??‘벗을 위한’ 레퀴엠??을 완성하기도 했다. 처음 만나던 당시 릴케의 일기에 적힌 시를 보면 파울라 베커에 대한 그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붉은 장미가 이렇게 붉은 적이 없었다네. 온통 비가 오던 그 저녁처럼. 나는 그대의 부드러운 머리를 생각했다네. 붉은 장미가 이렇게 붉은 적이 없었다네. ― 일기에 적은 릴케의 시 중에서 파울라의 인생에서 드물게 평안한 시기였던 예술인 마을의 생활은 1899년 브레멘 전시관에서 열린 전시의 혹평으로 그 종말을 고하게 된다. 자신의 예술을 “초보의 습작”, “예술에 대한 모독”으로 공격하는 피트거의 비판에 도망치듯, 그녀는 예술인 마을을 떠나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게 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파리 여행을 통해 파울라의 예술은 한층 성숙해진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후, 파울라 베커는 아내와 사별한 오토 모더존과 약혼하며 다시 한 번 보르프스베데의 예술인 마을에 정착한다. _결혼생활에 대한 회의와 예술에 대한 열망 오토 모더존과의 결혼생활은 파울라에게 생각지도 못한 시련을 안겼다. 결혼한 지 5년이 지나도록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으며, 서로의 화풍을 둘러싼 대립 역시 조용하지만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림에 대한 부인의 비판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듯 수용하는 오토 모더존과 달리 파울라는 묵묵히 자신만의 예술을 추구하는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오토 모더존은 자신의 그림에 대한 파울라 베커의 비판에는 귀를 기울이면서도 자신의 부인을 어디까지나 “진정한 예술가의 재능을 가진”, “언젠가는 성공할” 화가로만 받아들였다. 파울라에 대해 거의 무조건적인 경애를 보내면서도 자신의 부인이 이미 한 명의 화가임을 인정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민한 문제도 있었다. 파울라는 남편인 오토 모더존과 5년간 성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았다. 오토 모더존 역시 일기에서 자신의 탓임을 시인했다. 아이를 가진 어머니로서의 자신과 성공한 화가로서의 자신을 모두 이루고 싶은 파울라 베커에게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자꾸만 소원해지는 서로의 관계를 타개하기 위해 파울라가 택한 방법은 부부가 잠시 떨어져 지내는 것이었다. 곧 그녀는 자신의 또 하나의 예술의 근거지가 될 파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후 1906년까지 그녀는 모두 네 차례의 파리 방문을 시도하는데, 특히 마지막 파리 여행은 ‘오직 그림만을 그리기 위해’ 남편과의 이혼까지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서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는 더 이상 모더존이 아니고 파울라 베커도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