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함께 아프고, 함께 웃겠습니다.”
암 투병과 상실의 아픔이 빚어낸 이해인 희망 산문집
2011년 봄, 이해인 수녀가 암 투병 속에서 더욱 섬세하고 깊어진 마음의 무늬들을 진솔하게?담은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다가가본 사람은 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작고 소박한 일상의 길 위에서 발견하는 감사가 또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산문집으로는 근 5년여 만에 펴내는 신간《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에는 암 투병과 동시에 사랑하는 지인들의 잇단 죽음을 목도하는 아픔의 시간들을 견뎌내며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삶을 긍정하는 이해인 수녀의 깨달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잎이 보이듯이, 고통의 과정이 있었기에 비로소 보이는 일상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이 수도자로서의 삶과 살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삶을 아우르며 때론 섬세하게, 때론 명랑하게 그리고 때론 너무나 담담해서 뭉클하게 다가온다.
이해인 수녀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일상의 그 어느 하나도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감사”를 얻었다며, 보물찾기 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고백한다.
요즘은 매일이란 바다의 보물섬에서 보물을 찾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어 어느 때보다도 행복합니다.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주변에 보물 아닌 것이 없는 듯합니다. 나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이미 놓쳐 버린 보물도 많지만 다시 찾은 보물도 많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아직도 찾아낼 보물이 많음을 새롭게 감사하면서 길을 가는 저에게 하늘은 더 높고 푸릅니다. 처음 보는 이와도 낯설지 않은 친구가 되며, 모르는 이웃과도 하나 되는 꿈을 자주 꿉니다.
-<여는 글>에서
소박하고 낮은 세상을 향해 한결같이 맑은 감성의 언어로 단정한 사랑을 전해온 이해인 수녀는 이번 산문집에서 특히 자신이 직접 몸으로 겪은 아픔과 마음으로 겪은 상실의 고통을 과장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 꽃이 진 자리에도, 상실을 경험한 빈자리에도 여전히 푸른 잎의 희망이 살아 있다고 역설한다. 그는 수도자로서, 시인으로서, 개인으로서의 삶과 사유를 글 갈피마다 편안하게 보여줌으로써 부족하고 상처 입은 보통 사람들을 위로하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치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번 산문집에는 세계적인 판화가 황규백 화가의 그림을 함께 실었다. 정겨운 돌담, 작은 새 등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사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사람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내재된 정감을 일깨우는 작품들이 이해인 수녀의 글을 한층 더 깊이 있게 읽도록 이끈다.
또한 이해인 수녀가 월간 <샘터>에 2010년 한 해 동안 연재해왔던 <고운말 차림표>를 소책자로 만들어 독자에게 제공한다.
아픔을 승화시킨 삶의 기쁨, 눈물이 키운 삶의 힘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는 전체 여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해인 수녀의 일상을 담은 칼럼들과 오랜 시간 벼려온 우정에 대한 단상들, 수도원의 나날, 누군가를 위한 기도와 묵상 그리고 꽃이 된 그리움을 담은 추모의 글들이 매일 보물을 품듯 일기라는 그릇에 담겨 있다.
이번 산문집의 첫 장에는 익숙한 서문 대신 한 장의 꽃편지가 실려 있다. 이 책을 위해 글을 써주겠다는 약속을 뒤로하고 지난 1월 작고한 박완서 작가의 편지다. 이해인 수녀와 박완서 작가는 개인적인 고통의 시간들을 함께 통과하며 특별한 인연을 맺어 왔던 터라 그 아픔이 더했다. 이해인 수녀는 박완서 작가에 대한 추모의 정과 함께 나눈 시간에 대한 감사를 담아 늘 가슴에 품어 왔던 박완서 작가의 편지(2010년 4월 16일자)로 서문을 대신했다.
사랑하는 이해인 수녀님
그리던 고향에 다녀가는 것처럼 마음의 평화를 얻어 가지고 돌아갑니다.
내년 이맘때도 이곳 식구들과 짜장면을 (그때는 따뜻한) 같이 먹을 수 있기를,
눈에 밟히던 꽃과 나무들이 다 그 자리에 있어
다시 눈 맞출 수 있기를 기도하며 살겠습니다.
당신은 고향의 당산나무입니다.
내 생전에 당산나무가 시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꼭 당신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보다는 오래 살아 주십시오.
주여, 제 욕심을 불쌍히 여기소서.
2010. 4. 16. 박완서
제1장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_일상의 나날들>에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과 사람, 계절의 변화와 기억 등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잡아낸 생각들을 이해인 수녀의 감성으로 버무려 감칠맛 나는 언어로 엮어 낸다.
꽃이 지고 나면/ 비로소 잎사귀가 보인다/ 잎 가장자리 모양도/ 잎맥의 모양도/ 꽃보다 아름다운/ 시가 되어 살아온다// 둥글게 길쭉하게/ 뾰족하게 넓적하게// 내가 사귄 사람들의/ 서로 다른 얼굴이/ 나무 위에서 웃고 있다// 마주나기잎/ 어긋나기잎/ 돌려나기잎/ 무리지어나기잎// 내가 사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운명이/ 삶의 나무 위에 무성하다
-이해인, <잎사귀 명상>전문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더 잘 보이듯이 누군가 내 곁을 떠나고 나면 그 사람의 빈자리가 더 크게 다가온다. 평소에 별로 친하지 않던 사람이라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크게 보인다.
우리가 한세상을 살면서 수없이 경험하는 만남과 이별을 잘 관리하는 지혜만 있다면 삶이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웬만한 일은 사랑으로 참아 넘기고,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마침내는 이해와 용서로 받아 안는 노력을 멈추지 않으면서 말이다. 서로의 다름을 비방하고 불평하기보다는 ‘이렇게 다를 수도 있음이 놀랍고 신기하네?!’ 하고 오히려 감사하고 감탄하면서 말이다.
(……)
나하고는 같지 않은 다른 사람의 개성이 정말 힘들고 견디기 어려울수록 나는 고요한 평상심을 지니고 그 다름을 아름다움으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한다. 꽃이 진 자리에 환히 웃고 있는 싱싱한 잎사귀들을 보듯이, 아픔을 견디고 익어 가는 고운 열매들을 보듯이…….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에서
또한 법정 스님과 오랫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담은 <스님의 편지>에서는 다정한 미소를, <따뜻한 절밥 자비의 밥상>, 김용택 시인에게 보내는 <우리 집에 놀러오세요> 등에서는 명랑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가 하면, <어머니를 기억하는 행복>에서는 어머니를 그리는 딸의 그리움이 읽는 이의 가슴에 엷은 슬픔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불안과 의심 없는 세상을 꿈꾸며>에서는 우리의 삶과 동떨어지지 않은 수도원의 일상을 엿볼 수 있어 새롭다.
제2장 <어디엘 가도 네가 있네_우정일기>에는 이해인 수녀가 10여 년간 쓰고 지우며 쌓아 온 우정에 대한 단상 60여 편이 담겨 있다. 이해인 수녀 특유의 맑은 감성과 투병 중의 인간적인 마음을 투정하듯 위로받듯 오롯이 드러낸 단상들은 그 행간에서 뭉클함을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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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에 가는 길, 오늘은 비가 내리네. 너를 향한 동그란 그리움과 기도……. 멈추지 않는 나의 웃음을 어찌 알고 동그란 빗방울들이 봉투에 먼저 들어가 있네.
_동네 우체국에 가는 길은 늘 행복하다. 편지를 쓰는 일은 살아서 할 수 있는 아름답고 거룩한 소임이다. 때론 허름한 옷에 앞치마까지 두르고 간 적도 있는데 “수녀님이 정말로 글 쓰는 해인 수녀님 맞으시나요? 멀리 계시다고 여기던 분이 바로 앞에 계시니 참 신기하네요.” 우편물 점검하던 여직원이 웃으며 차 한 잔을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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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농사지어 보내 준 포도 잘 받았어.
큰 수술 이후 회복기의 금식을 깨고 과일 먹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