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Description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으로 다시 발원한 『탁류』 1930년대, 자본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식민지 조선의 부조리한 현실을 하류에 이르면서 흐려지는 금강에 비유한 명작,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가 문학과지성사의 한국문학전집 마흔두번째 책으로 출간됐다. 『탁류』는 『태평천하』와 더불어 작가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1937년 10월 12일부터 1938년 5월 17일까지 총 198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으며 분량은 200자 원고지 2,300여 매에 달한다. 국내 유수의 대학들과 기관에서 내놓는 필독서 목록에 빠짐없이 오르는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를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시리즈의 산뜻하고 편안한 편집으로 만나보자. 철저한 원본 대조를 통한 정본화, 가독성은 높이되 작품에 녹아 있는 시대상을 보존하기 위해 생소한 어휘에 달아놓은 미주들, 작가의 생애가 한눈에 펼쳐지는 작가 연보와 작품 연보, 그리고 전공 교수들의 개성 있는 해설은 이 시리즈가 한국현대문학전집 시장에서 독보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다. 돈에서 시작돼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 비극 작품은 군산의 한 미두장에서 돈을 잘못 놀린 ‘정주사’가 자식뻘 되는 젊은이에게 모욕을 당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미두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쌀 선물거래다. 미두처럼 초고도로 복잡하게 파생된 자본증식 시스템은 끊임없이 유입되는데 그 앞에서 ‘정주사’와 같은 일반인은 구조적 모순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돈을 향한 마음만 자꾸 앞세우다가 주머니를 몽땅 털리고 만다. 채만식은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파탄으로 내몰고 마는 정주사의 이런 행태를 한 개인의 비뚤어진 욕망으로 치부해버리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몰락을 부추기는 사회의 병리적 구조를 감지했고 정주사의 물욕은 그 안에서 발견될 최초의 통점으로 삼은 것이다. 돈을 둘러싸고 온갖 모함과 사기가 횡행하다가 급기야 살인까지 벌어지고 마는 모습은 비단 1930년대만이 아니라 8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한 사회상이다. 혼탁한 시절과 맞씨름하며 시대의 고난을 직관한 소설가 채만식은 1925년 『조선문단』에 중편 「세길로」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열정적인 창작열과 리얼리즘 정신으로 당대의 현실상을 매우 예리하게 형상화했다. 일제 식민지 정책이 강화되고 자본주의가 본격화되는 현실에서 그는 민족의 운명과 현실을 매우 부정적인 시선으로 파악한 작가에 속한다. 사람다운 삶이 그 뿌리를 상실한 채 부유하는 현실을 그는 마성적 자본주의의 폐해, 반민족적 작태의 문제성으로 직관하고, 그 현실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려는 열의를 보였다. 특히 채만식은 1934년부터 1938년 사이에 풍자를 통해 부정적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소설들을 많이 발표했다. 만주사변 이후 일제 식민 통치는 강화되어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곤경도 심해지고 문화적으로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다. 한마디로 청류(淸流)가 아닌 탁류(濁流) 같은 시절과 맞씨름하며, 소설로 시대의 고난을 증거하고 새로운 산문 정신을 열어나가고자 했던 작가가 바로 채만식이었다. 파행적인 자본주의화에서 생겨난 독소 『탁류』의 서사를 이끄는 인물은 초봉이다. 돈에 눈먼 아버지 정주사 때문에 사기꾼이자 호색한인 은행원 고태수에게 팔려가듯 시집을 가는데 결혼한 지 열흘을 겨우 넘겨 악랄한 고리대금업자 장형보의 농간으로 남편 고태수는 탑삭부리 한참봉에게 맞아죽으며 그러는 사이 장형보는 초봉을 겁탈한다. 평소 초봉이 믿고 의지했던 약국 주인 박제호는 부인과 별거함과 동시에 초봉의 처지를 이용해 첩으로 들이는데 초봉이 딸 송희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욕정이 시들해져버리자 마침 송희의 친권을 주장하며 나타난 장형보에게 모녀를 떠넘겨버린다. 초봉은 제게 순종을 강요하며 아이를 학대하는 장형보를 맷돌로 쳐 죽이고 만다. 이 소설은 어느 가련한 여주인공의 비극적 인생사로 요약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비극의 전개가 자본의 약육강식 논리에 좌우되고 있음을 눈치챈다면 이야기는 좀더 풍성하게 다가온다. 이 소설에서 사랑과 인륜과 도덕은 더 이상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금전과 교환되는 재화에 지나지 않는다. 초봉은 마음을 두고 있던 예비 의사 남승재가 아닌 고태수를 사위로 점찍은 아버지의 계획이 야속하지만 어느새 고태수의 재력이 가져다 줄 편의를 인정하고 순응하게 되고 초봉이라는 한 개인의 육체와 이상을 돈으로 살 수 있음을 목격한 장형보나 박제호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초봉은 남자들의 비뚤어진 권력 구조 속에서 반평생을 시달리느라 얌전하고 순종적이던 성격이 사람을 죽일 만큼 독기를 품게 된다. 초봉이 자신을 놓고 박제호와 정형보가 벌이는 협잡에 피를 토할 듯 저주하는 장면은 짙고 묵직한 연민을 불러일으키며 나중에 저지를 살인를 암시한다. “내가 느이허구 무슨 원수가 졌다구 요렇게두 내게다 핍박을 하느냐? 이 악착스런 놈들아!…… 아무 죄두 없구, 아무두 건디리잖구 바스락 소리두 없이 살아가는 나를, 어쩌면 느이가 요렇게두 야숙스럽게…… 아이구우 이 몹쓸 놈들아!”(p. 478) 여전히 오늘의 이야기 초봉의 동생 계봉과 초봉이 처음에 맘에 두었던 예비 의사 승재는 『탁류』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인물들이다. 채만식은 초봉의 서사와 계봉-승재의 서사를 함께 엮어나가는 동안 초봉으로 대변되는 하층 서민들이 겪는 애환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진단해본다. 작품 후반에 부의 편중을 우려하는 계봉과 승재의 대화는 자못 의미심장하며 다들 인지하다시피 그 시의성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글쎄 제가 가난허구 싶어서 가난한 사람이 어딨수?” “그거야 사람마다 제가끔 부자루 살구 싶긴 하겠지……” “부자루 사는 건 몰라두 시방 가난한 사람네가 그닥지 가난하던 않을 텐데 분배가 공평털 않아서 그렇다우.” “분배? 분배가 공평털 않다구?……” (p. 597) 2014년 지금 이곳은 여전히 80여 년 전의 군산이고 우리 곁에는 아직 수많은 초봉이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가난이 마치 죄인 양 자본의 질서에 수긍하고 순종해야만 실오라기 같은 삶이나마 유지할 수 있다. 오늘이 고달프고 내일도 아득한 사람들이다. 그런 와중에도 자본은 끊임없이 증식하고 있고 불어난 돈은 계속해서 어느 한쪽으로만 몰린다. 채만식은 탁류의 한가운데 서서 청류가 흐르는 강을 꿈꾸며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한번 흐려진 물이 다시 맑아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고 있었던 듯 다음과 같은 서술을 남겼다. 물화와 돈과 사람과, 이 세 가지가 한데 뭉쳐 생명 있이 움직이는 조그마한 거인은 그만한 피비린내나, 뉘 집 처녀가 생애를 잡친 것쯤 그리 대사라고 두고두고 잊지 않고서 애달파할 내력이 없던 것이다. [……] 그러는 동안 거인은 묵묵히 걸음을 걷느라, 물화는 돈을 따라서, 돈은 물화를 따라서, 사람은 그 뒤를 다라서 흩어졌다 모이고 모였다 흩어지고, 그리하여 그의 심장은 늙을 줄 모르고 뛰어…… (pp. 490~91) 어렵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태평천하』 등에서 보여준 채만식 특유의 풍자와 해학과 냉소 덕에 어려움 없이 책장이 넘어간다. 한 작품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모든 조건을 갖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날카로운 인식으로 세태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문제의식의 가지를 넓게 뻗는 소설, 그러면서도 경쾌한 호흡과 생동감 있는 인물을 통해 서사의 재미를 안겨주는 소설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탁류』를 책장 맨 위에 꽂아놓게 될 것이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으로 출간된 채만식의 소설 단 편 선 『레디메이드 인생』(한국문학전집 4) 장편소설 『태평천하』(한국문학전집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