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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고형렬 ・ 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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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고형렬 · Poem
2010 · Korea, Republic of · 142p
1979년 등단 이래 일관되게 담백하면서도 묵직한 시적 성찰을 보여온 고형렬 시인이 4년 만에 펴낸 신작시집. 시력 30년을 넘긴 시인의 정교한 솜씨가 돋보이는 가운데 더욱 다채로운 화법으로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무변한 세계를 넘어서는 시적 인식을 보여준다.

Description

세상을 건너는 투명하고 서늘한 시의 눈길 1979년 등단 이래 일관되게 담백하면서도 묵직한 시적 성찰을 보여온 고형렬 시인이 4년 만에 신작시집을 펴냈다. 시력 30년을 넘긴 시인의 정교한 솜씨가 돋보이는 가운데 더욱 다채로운 화법으로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무변한 세계를 넘어서는 시적 인식을 보여준다.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일상이나 고향을 소재로 한 시가 줄어든 대신 식물적인 세계를 묘사한 시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는 식물은 여리고 조용하기만 한 비유적인 존재가 아니다. 식물들의 세계는 감각과 활력으로 가득 차 있다. 조용히 있어야 집중되고 물이 올라온다는 걸 안 풀줄기들 / 물소리, 아 물달개비들 날갯소리, 여름의 물 아우성 / 고무판 노란 오리물갈퀴가 뒤로 회똑 뒤집히면서 앗 / 몸이 출렁여, 온 태양의 들판엔 물질이 한창이다(「달개비들의 여름 청각」 부분) 문득 수박줄기는 포복을 멈췄다, / 더 갈까? 순이 뒤돌아본다 참 오래 한 일이지만 무작정 간다고 되는 법이 없는 것을 안다 잎에 가린 뿌리 쪽이 보이지 않는다 둥지를 틀고 머리를 감아올린다 저쪽에서 물 들어오는 소리 들린다(「수박」 부분) 작고 세밀한 움직임과 시각과 청각을 포착하는 시인의 감각이 섬세하다. 시집에서 때로 여러 시점을 넘나들며 복합적이고 생생한 장면을 형상화하는 수법이 더욱 정교해진 것도 볼 수 있다. 백석의 시를 제재로 한 시 「거미의 생에 가보았는가」에서 시인은 거미의 시선이 되기도 하고 거미를 보는 백석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선이 되기도 하며, 「브롱크스 장터를 간 시인」에서는 시인과 수탉과 제3자를 넘나드는 다양한 시선들을 치밀하게 직조해낸다. 한 남자는 앞에 다가가 앉는다 수탉이다 볏은 피멍이 들고 발톱은 늙었다 추억만 남았다 그는 장터에 뭘 사러 온 게 아니었다 생명 같은 것을 살 생각은 더더욱 없다 이것은 뒤에 미소짓고 앉은 주인의 대뇌피질의 움직임(「브롱크스 장터를 간 시인」 부분) 이런 의식적인, 상상적인 감각이 그려내는 장면은 무심한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 짙은 비애를 깔고 있기도 하다. 때로는 시인 자신의 절망에 가까운 비감을 직접적으로 토로하기도 한다. “결국 황폐화는 돌이킬 수 없는 시의 귀속”(「나의 황폐화를 기념한다」), “시가 도달할 수 없는 핏빛 절망의 벽”(「우스꽝스러운 새벽의 절망 앞에」). 시인은 자신의 고독과 비애 속에서 날카로운 감각을 밀어붙여 다른 세계에 닿으려 하지만, 한편으로 시는 온전히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회의와 절망은 불가피하다. 물방울이 정지한다, 어찌할 것인가, 바람이 떨고 있다, 나는 경험한다 날개를, 나를 경험한다, 마침내 나는 유리창이다, 아 너무나 작은, 물방울의 날개여 // 나는…… 날개의 나는, 찢어지고 절망한다, 이 불완전한 문장을 지울 수만 있다면, 저쪽에 오롯이 그것들의 날개를 펼칠 것인데(「어느날은 투명유리창의 이것만이」 부분)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회의와 절망까지도 시의 동력으로 삼아 더 전진한다. 그리하여 시 속에서 바라보는 대상과 관찰하는 ‘나’와 시 쓰는 ‘나’가 서로 교차하며 길항한다. 표제작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에서는 시 쓰는 ‘나’와 시 속의 ‘나’가 분리되며 모호하고 아름다운 슬픔을 자아낸다.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 이 문장은 성립하지 않고 시상이 전개되지 않는다 /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말은 / 상상할 수 없는 걸 상상하므로 항상 제기되는 문제다 / (…) / 에르덴조 사원에 없는 나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 그런데 그대여 왜 그대는 에르덴조 사원엔 없는 건가 / 나는 지금, 그때, 에르덴조 사원에 머물고 있어라 / 나는 정처가 없어서 나무처럼 외로워 보인다(「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부분) 이러한 분열은 시의 언어로써 일반언어 또는 공동체의 규율에 균열을 내는 작업으로 읽히기도 한다(김종훈 ‘해설’). “정치와 시는 언제나 맞은편에서 미래의 이곳을 본다”(「서서 별을 사진찍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럴 때 식물의 세계는 인간 공동체의 소란스러운 언어에서 벗어난 곳으로 여겨진다. 문득, 통화권이탈지역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 소란한 세상을 닫아건 잎들의 무늬를 읽는다 / 그대 잠시 두리번, 결락된 감각을 찾는가 / (…) / 여기서 그 모든 분란의 소통은 차단되었다 / 빛은 떠나고, 혼돈이 거니는 어둠 한쪽 / 완전 통화권이탈지역에서 너와 나는 오래전 / 서로 잃어버린 것을 조용히 만지고 있다(「통화권이탈지역」 부분) “너무 쉬운 소통은 내부를 잃고 말기에” 이곳에서 “자생란의 언어는 소통을 꺼”리고(「꼭 말해야만 하나요? 」), 러브체인은 “더 크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자신을 확장하지 않는다”(「0.1밀리미터의 러브체인」). 사라져가는 푸른미선나무가 “자신이 왜 푸른미선나무인진 모른” 채로 “잎사귀와 관다발만 수없이 만”드는 이곳에서는 “빛을 모아들이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광합성에 대한 긍정의 시」). 시인은 소란한 세상과 단절된 이곳에서 이 작고 하잘것없는 것들의 운명과 태도를 섬세한 눈으로 들여다보며 자신과 언어와 시를 회의하고 반성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인은 분명 “소란 속에/커다랗게 귀를 열어놓고 시를 쓴다”고, “나의 시는 소란 속에 정교해진다”(「결코 조용하지 않은 시에게」)고도 말하고 있다. 시인은 단순히 순정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는 데 그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며, 시인이란 뼛속까지 언어로 이루어진 존재임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시인이 그리는 자연의 대상들은, 나아가 이 시집 전체는 익숙하고 순연한 깨달음에 머물기보다 날카로운 감각과 상상과 단단한 언어적 자의식으로 충일하다. 그동안도 그러해왔지만, 어떤 규범에도, 자연에도, 자신에게도 기대지 않고 고독한 언어를 무기 삼아 치열한 성찰을 거듭하는 고형렬 시인의 전례없는 한 경지가 이 시집에 담겨 있다.

About the Author

1954년 속초에서 출생, 1979년 현대문학에 『장자』를 발표하며 시단에 나왔다. 지훈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일연문학상, 백석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꾸준한 시작 활동을 통해 시인의 사유 세계를 확장시켜왔다. 시집 『대청봉 수박밭』 『성에꽃 눈부처』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 『유리체를 통과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장시 『리틀보이』 『붕새』 산문집 『은빛 물고기』 『장자의 하늘, 시인의 하늘』 『바람을 사유하다』 등을 간행했다. 또한 2000년부터 계간 『시평』을 창간하여 아시아의 먼 시인들과 교류하며 아시아적 가치와 사유를 공유하기 위해 애썼다. 현재 양평 지평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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