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옮긴이 서문
제1권 신들의 회의 후 아테네가 텔레마코스를 격려하다
제2권 이타케인들의 회의_텔레마코스의 출항
제3권 퓔로스에서 있었던 일들
제4권 라케다이몬에서 있었던 일들
제5권 칼?梔弩? 동굴_오뒷세우스의 뗏목
제6권 오뒷세우스가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 가다
제7권 오뒷세우스가 알키노오스에게 가다
제8권 오뒷세우스가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 모물다
제9권 오뒷세우스의 이야기들_퀴클롭스 이야기
제10권 아이올로스_라이스트뤼고네스족_키르케
제11권 저승
제12권 세이렌 자매_스퀼라_카?層凋?_헬리오스의 소들
제13권 오뒷세우스가 파이아케스족의 나라를 떠나 이타케에 도착하다
제14권 오뒷세우스가 에우마이오스를 찾아가다
제15권 텔레마코스가 에우마이오스에게 가다
제16권 텔레마코스가 오뒷세우스를 알아보다
제17권 텔레마코스가 시내로 돌아가다
제18권 이로스와의 권투시합
제19권 오뒷세우스가 페넬로페와 대담하다_세족(洗足)
제20권 구혼자들을 죽이기 전에 있었던 일들
제21권 활
제22권 오뒷세우스가 구혼자들을 죽이다
제23권 페넬로페가 오뒷세우스를 알아보다
제24권 저승 속편_맹약
부록
주석
주요 인명
주요 신명
주요 지명
주요 신들과 영웅들의 가계도
해설/호메로스의 작품과 세계
참고문헌
찾아보기
오뒷세이아
Homer
672p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진 망망대해에서 쉽게 길을 잃고 끊임없이 떠돌아다닌다는 것. 이러한 모험을 통해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삶이며 삶의 여정이다. <오뒷세이아> 이후 '인생은 오뒷세이아' 표현이 생긴 이유다. <오뒷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에서 목마를 고안해 승리를 이끌어낸 그리스 영웅 오뒷세우스가 전쟁이 끝난 후 귀향을 이루지 못하고 바다 위에 떠도는 이야기다. 배가 난파되고, 동료들을 잡아먹는 외눈박이 거인 퀴클롭스의 동굴에 갇히고, 신들과 왕들 노예를 만나는 등 험난한 고난의 10년 세월 동안 겪는 온갖 모험이 주된 내용. 국내에서 <오뒷세이아> 원전 번역이 출간된 1996년 이후 변화된 언어감각에 맞추어 직역으로 어색했던 표현을 재번역했다. 자신을 위협하는 신화적 힘을 극복하면서 귀향을 이루는 오뒷세우스 이야기에 녹아있는, 인간에 대한 다양한 본질과 통찰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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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연
4.5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판본으로 읽음)
얼그레이 밀크티
4.0
신 때문에 고통받는 오디세우스와 오디세이아를 읽으면서 고통받는 나
사월🌱
4.0
고국에 가닿으려는 고단한 여정, 주체로 거듭나려는 험난한 항해.
최일섭
4.5
한 번 얻은 지혜가 영원한 것은 아니다. 지혜로운 오디세우스는 여행길에서 지혜를 다시 얻고 단련해야 했다. 신의 아들이라도 하나의 눈(시각)만 있다면 괴물이 될 수 있으며, 다양한 만남과 사귐 속에서만 지혜가 획득된다. 노골적인 폭력과 성적인 꾐, 그리고 무책임의 유혹을 극복하고 집에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 여행은 우여곡절이 있을지라도 귀환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장담이 되며, 아내에게 구혼하던 남자들에게 화살을 쏴 이를 완성했다. 오디세우스의 지혜(이성)는 자신의 부하를 모두 희생시키면서 얻었고, 학살로 끝을 맺었다. 이로써 다시 질서가 섰다.
말차맨
3.0
새해의 다짐이 튼튼한 하체를 만드는 것이라 한껏 쇳덩이를 들어보는데 완력이 부족한 탓인지 쉽게 지치고 만다. 그래도 오기는 있어서 이가 갈리는지도 목에 힘이 바짝들리는지도 모른 채 힘줄을 쥐어짜보는데 이 또한 역부족이라 매 시진마다 근육들은 조그마한 좌절감을 기억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워털루의 전세를 뒤바꾸었던 포병부대의 절묘한 타이밍과도 같이 내게도 원군이 제 때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정신력의 존재를 기대해본다. 하지만 광풍은 울창한 삼림이 앞에서 가로막지 않으면 허공에서 흩어져버린다고 했나. 나의 정신력은 목표한 바가 뚜렷하지 않아 하나의 힘으로 전환되지 못한다. 아무래도 나의 정신력은 온전히 보습대일 땅을 필요로 하는 것이겠지. 한참을 뒤지고 또 뒤지고, 그래서 나는 결국 아이네아스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한 때 라틴어를 공부할 적에 교재에서 보았던 그림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림 속에서 아이네아스는 늙은 아버지를 어깨에 이고 아들을 한 손으로 잡은 채 적병들과 맞써 싸워야 했고, 그래서 아내에게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결국 아내는 죽었고, 나는 아이네아스가 팔이 세개였거나 신화 속에 그렇게 흔히 등장하는 거인이 아니였다는 사실이 슬프고, 비통하여 아이네아스의 강함이 도리어 한없이 약하게만 느껴진다. 비록 내가 아내를 잃는다는 것이 어떤 슬픔인지 알 겨를은 없지만, 알고 싶지도 않지만, 매우 매우 매우 하늘이 무너질 것이므로 아이네아스를 탓하는 마음이 커진다. 만약 내가 사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 우리가 피난을 가야한다면. 먼 훗날 나와 내 아내는 가산을 뒤에 이고 어디로든 안전한 곳을 찾아나설진데 만약 내 아내가 실수로 발을 헛디뎌서 발목이라도 삔다면. 나는 우리의 봇짐을 모두 내려놓고 아내를 업어 빨치산 영화 속에서나 보았던 이제 막 피는지 지는지 알 수 없는 꽃덤불 사이를 헤치며 우리 둘 한 몸 쉬일 수 있는 동굴같은 것을 찾아 헤메야할텐데. 내 다리가 이토록 약하여 당신마저도 업을 수 없다면 나는 평생을 울어야할지도 모를텐데. 이제야 나는 누군가를 업어줄 수 있다는 것이 그를 지켜줄 수 있다는 것임을 온전히 알게 된 것인데. 아이네아스를 떠올리면 자세를 비틀어서라도 개수를 한 두개 정도 더 채우게 된다.
홍준영
5.0
오뒷세이아 오디세이. 출항. 드넓은 "오뒷세이아"를 향해 출항하고 나면 비로소 발을 디디고 떠났던 항구가 한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로 호메로스의 전작 "일리아스"다. 호메로스는 마치 항해를 시작하기 전 부둣가를 꼼꼼히 살피는 선장처럼, 24권에 걸친 이야기를 풀어놓기 전에 1권부터 4권까지를 "일리아스"의 뒷이야기에 할애한다. (그 대목이 실제로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찾기 위한 ‘항해를 준비하는’ 내용과 일치하는 것도 우연한 배치가 아닐 것이다) 읽는 이는 여기서 혈관을 뜨겁게 달구는 용맹스러운 생명력으로 무장했던 영웅들의 초라한 퇴장을 목격하게 된다. “그곳에서 우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들이 모두 죽었네. 그곳에 용맹스러운 아이아스가 누워 있네. 그곳에 아킬레우스가, 신에 버금가는 조언자인 파트로클로스가 누워 있네.” . "오뒷세이아"의 도입부는 그 누구보다도 강인해 보였던 "일리아스"의 영웅들의 무용담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불 꺼진 무대를 바라볼 때와 같은 헛헛한 쓸쓸함을 남긴다. 그러나 모두가 퇴장한 무대만큼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좋은 배경은 없다. 호메로스는 아가멤논의 카리스마도 아킬레우스의 사나움도 오뒷세우스의 서사를 방해할 수 없도록 설정한 다음, 능숙한 카메라맨처럼 네스토르나 메넬라오스와 느긋하게 어울리는 육지의 텔레마코스를 비추던 조명을 5권에서 볼 수 있듯 뗏목을 타고 거센 바다를 헤매는 오뒷세우스에게로 옮긴다. 이제 트로이아 전쟁의 ‘후일담’에 불과했던 살아남은 자 오뒷세우스는 첫 4권을 통해 완전히 "일리아스"와 분리되고, 1권부터 4권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던 자신의 입을 열고 장대한 ‘플래시백’ 즉 회상을 시작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비로소 "오뒷세이아"의 바다를 여행하게끔 인도하는 것이다. 정박. 호메로스의 시선에 포착된 오뒷세우스는 5권에서 유혹적인 칼륍소의 동굴을 떠나 또다시 뗏목을 타고 바다로 향한다. 섬을 떠나겠다는 그의 선언은 단순한 귀향 의지의 표현을 넘어 가슴 벅찬 인간 찬가로까지 읽힌다. “설혹 신들 중에 어떤 분이 또다시 포도줏빛 바다 위에서 나를 난파시킨다 해도 가슴속에 고통을 참는 마음이 있기에 나는 참을 것이오. 이미 파도와도 전쟁터에서도 많은 것을 겪고 많은 고생을 했소. 그러니 이들 고난에 이번 고난이 추가될 테면 되라지요.”푸슈킨의 시구처럼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신들이 정한 운명과 기꺼이 부딪혀 자신의 삶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오뒷세우스는 고대 그리스 문학을 관통하는 어떤 감동적 인간상의 선구자이다. 그는 삶을 꽉 잡고는 “큰 파도가 지나갈 때까지 신음하며 그것을 꽉 붙잡고”버틴다. . 간신히 파도를 견뎌낸 오뒷세우스는 대지에 입을 맞추고 낙엽 속에 맨몸을 파묻어 생명으로 충만한 자연과 마음껏 교감한다. 광활한 우주에서의 방랑을 마치고 지구로 귀환한 영화 "그래비티"의 주인공처럼, 바다에서 이전 삶을 모두 내려놓고 존재에 대한 의지를 굳건히 한 그는 비로소 우뚝 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호메로스는 피로에 찌든 오뒷세우스를 잠시 알키노오스의 궁전에서 쉬도록 허락하며 한참 정신 바쁘게 "오뒷세이아"를 항해하던 읽는 이에게도 휴식처를 제공한다. 빠른 호흡으로 긴박한 장면을 그려내다 때때로 느린 쉼표를 찍는 이러한 서사적 강약의 조절은 호메로스의 재능뿐만 아니라 오뒷세우스의 삶의 자세 역시 반영하는 듯하다. 그는 장애물로 가득한 여정을 꿋꿋이 수행하면서도 작은 기쁨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에게 숙식을 베푸는 파이아케스족은 삶이 품은 느긋한 여유라는 한 단면을 보여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전의 섬. 5권부터 8권까지 오뒷세우스와 잠시 숨을 돌린 읽는 이는 다시 위험천만하고 그만큼 다채롭고 신비로운 섬들이 가득한 대양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판 "신밧드의 모험"을 기대하고 책을 편 읽는 이는 이제야 비로소 이 세상 어딘가 숨겨져 있을 신비를 드러내는 마술적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첫 번째로 모습을 드러내는 섬은 퀴클롭스 폴뤼페모스의 섬이다. 이 외눈박이 거인은 여러모로 "일리아스"의 영웅들을 연상시킨다. 폴뤼페모스는 “나더러 신들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라고 말하다니 너는 어리석거나 멀리서 왔나 보군. 퀴클롭스들은 아이기스를 가진 제우스도 축복받은 신들도 아랑곳하지 않아. 우리가 훨씬 더 강력한데 뭐.”라고 말하며 트로이아 전쟁에서 여러 차례 신들을 대적하거나 심지어는 창으로 직접 찔렀던 영웅들의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거대한 체구와 위협적인 아우라로 오뒷세우스 일행을 겁에 질리게 하는 면모도, "일리아스"의 영웅들이 죽으면서까지 얻으려고 했던 ‘명성’이 많은 자라는 뜻의 이름도, 꾀나 지력이 아닌 남성적 전투력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태도도 모두 "일리아스"의 일그러진 판본을 읽는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 그에 반해 오뒷세우스는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요. 사람들은 나를 ‘아무도 아니’라고 부르지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다른 전우도 모두.”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을 극한까지 낮춰 정의한다. 이는 뒤에 살펴보듯 오뒷세우스가 성장할 수 있는 출발점으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모님의 영광도 전우들의 생명도 지켜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한 처지에 대한 오뒷세우스의 자조적인 촌평이기도 하다. 그는 싸우는 두 사내의 신분에 따라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던 "일리아스"의 기준에서 봤을 때 포세이돈의 아들 폴뤼페모스에게 패배해야만 하는 보잘것없는 인간이다. 이는 눈먼 폴뤼페모스의 분노에 찬 한탄에서 더 직접 드러난다. “나는 늘 큰 용맹으로 무장한, 키가 크고 준수한 사내가 이리로 오기를 기다렸지. 그런데 지금 한 왜소하고 쓸모없고 허약한 자가 나를 포도주로 제압한 뒤 눈멀게 했구나!”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일리아스"의 형식적 규범이 폭력적으로 전복되면서 읽는 이가 느끼는 충격과 놀라움이 증폭되고, 오뒷세우스가 여정에 성공하리라는 가능성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오뒷세이아" 읽기의 항해에는 탄력이 붙는다. 동시에 호메로스는 자신이 그토록 굳건하게 지켜왔던 작품 속 원칙을 왜, 그리고 어떻게 뒤집었을지에 대한 의문이 솟는다. . 호메로스가 "일리아스" 집필 후 변화한 사회상에 대응하고자 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할 것이다. "일리아스"의 세계관은 철저히 귀족 중심적이며 기존 엘리트를 옹호하는 보수적 관점을 일관적으로 고수한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뒤를 이은 헤시오도스가 보이는 현실적이고 심지어 서민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문학세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리스 사회는 엘리트주의의 껍질을 서서히 벗어던졌다. 호메로스는 더는 폴뤼페모스와 오뒷세우스의 대결에서 고귀한 혈통의 손만을 들어줄 수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위대한 변주를 설명하는 더 매력적인 방식은 작가가 "일리아스"에서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착상을 "오뒷세이아"에서 비로소 구현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눈먼 가인은 때로는 신과 같고 때로는 짐승과도 같았던 "일리아스"의 영웅들을 통해 인간이라는 조건의 한계를 위아래로 모두 탐색한 후에야,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답을 얻고 난 후에야 지상에 발을 디딘 한 인간의 서사에 집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전작에서 인간 조건의 파악을 위해 설정했던 규칙은 당연히 고리타분하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졌으리라. 실존의 섬. 9권의 섬을 떠나 10권의 섬에 도달한 읽는 이는 그곳에서 변덕스러운 바다만큼이나 혼란스럽고 어지럽게 변화하는 작품의 분위기를 맞닥뜨려야 한다. "오뒷세이아"의 항해가 예측할 수 없는 기상변화를 만나는 셈이다. 아이올리에 섬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평화로운 인상을 주었다가 바로 그 희망을 앗아간다. 라이스트뤼고네스족의 섬은 맑은 샘에서 물을 긷는 소녀가 아버지의 집을 가리키게 하면서 오뒷세우스가 마주쳤던 따뜻한 파이아케스족의 섬을 연상하도록 유도하다가, 즉시 가장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선보이면서 읽는 이의 예상을 배반한다. “그들은 암벽 위에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한 짐이나 될 만한 돌덩이들을 우리를 향해 던졌소. (중략) 그리고 그들은 내 전우들을 마치 물고기처럼 작살로 꿰어 끔찍한 식사를 위해 가져가 버렸소." 그러한 플롯의 예측 불가능성은 키르케의 섬에서 극에 달한다. . 이처럼 오뒷세우스 일행의 여정에 일체의 예측을 허용하지 않는 호메로스의 플롯은 사실 사르트르가 지적한 인간 실존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맥베스"에서처럼, 아이올리에 섬은 운명의 선물로 보였던 것이 언제든 저주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영화 "큐브"에서처럼, 라이스트뤼고네스족의 섬은 과거의 귀납적 경험이 사실은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뻔뻔히 드러낸다. 영화 "곡성"에서처럼, 키르케의 섬은 외부 세계의 그 무엇도 주체의 최종적인 선택에 단서를 줄 수 없음을 일러준다. 예시로 든 세 작품이 도달하는 공통의 주제인 인간 실존의 현실에 대해서 기원전의 호메로스는 20세기의 지성 사르트르와 같은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선택해야 한다.’ 키르케는 저승으로 향해야 귀향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미 속임수를 쓴 전력이 있는 그녀의 말을 믿고 출항하는 건 오로지 오뒷세우스만의 선택이다. 그는 자신이 ‘내던져진’ 환경에 눈물을 흘려보았자 아무 의미 없다는 점을 안다. 그는 다만 배를 끌어 내리고 돛대를 싣는 데 집중할 뿐이다. 반성의 섬. 오뒷세우스는 오케아노스의 경계까지 항해하며 호메로스 세계관의 극한을 만난다. 11권의 저승은 “신부들과 젊은이들, 많은 것을 견뎌낸 노인들과 이제 처음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쾌활한 소녀들뿐 아니라 청동 날이 박힌 창에 맞아 죽은 많은 사람과 전쟁터에서 살해되어 무구들이 피투성이가 된 남자들”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문학적 자유가 거의 무한히 발산되는 공간이다. 만화 "신과 함께"에서처럼 저승은 인물들이 살아 있던 시절을 반성하게 하여 읽는 이 역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도록 활용될 수도 있다. 영화 "코코"에서처럼 저승은 이승의 연장선으로 오히려 죽음으로 인한 단절과 망각의 공포를 극복하고 가족과 동료들이 다시 하나 되리라는 희망을 주는 장소로 활용될 수도 있다. 뮤지컬 "렌트"에서처럼 저승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상기시킴과 동시에 오늘 하루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가장 중요한 명제를 일깨워 주는 소재가 될 수도 있다. 물론 호메로스는 서양 문학사의 거인답게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활용법을 모두 물 흐르듯이 구사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술한 작품들이 호메로스라는 거대한 원천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다. . 그러나 11권은 많은 이들에게 아킬레우스의 독백으로 기억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의 뜨거웠던 영웅들을 모두 쓸쓸히 퇴장시키면서 "오뒷세이아"가 시작했던 만큼 혼백이 되어버린 그들의 재등장은 지우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특히 가장 용맹했던 아킬레우스의 독백은 ‘살아 있음’에 대한 가장 절절한 그리움이자 찬가로써 강렬한 울림을 남긴다. “죽음에 대해 내게 그럴싸하게 말하지 마시오, 영광스러운 오뒷세우스여!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들을 다스리느니 나는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뱅이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아킬레우스의 한숨 섞인 토로는 뮤지컬 "렌트"의 노래처럼 읽는 이가 하루를 후회 없이 살고 있는지 문득 되돌아보도록 이끈다. 그리고 호메로스는 안티클레이아의 입을 빌려 독자들에게 그러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죽게 되면 당하는 운명이란다. (중략) 너는 빛을 향해 어서 빨리 서둘러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명심해두었다가 나중에 네 아내에게 말해주어라.” 의미 있는 것은 지금 여기, 지금 우리뿐이다. 광기의 섬. 세계관의 극한을 넘어섰다 돌아온 인물은 전과 같이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9권부터 11권까지 등장한 기이한 존재들인 퀴클롭스, 라이스트뤼고네스, 키르케, 저승의 혼백들은 모두 어느 정도까지는 사람의 형태라는 공통분모를 오뒷세우스와 공유했다. 그러나 오케아노스 강을 건넌 오뒷세우스의 눈에는 이제 자기 자신과 근본적으로 다른 초현실적 존재들이 들어온다.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세이렌 자매, 화염에 싸인 채 바다 위를 떠다니는 거대한 플랑크타이 바위들, 문학사상 손꼽힐 기괴함으로 무장한 스퀼라와 카륍디스, 고깃덩이가 된 후에도 음메 소리를 내는 헬리오스의 소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초현실의 세계를 다루는 호메로스의 솜씨는 고대 그리스인의 정신보다는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정신과 가까워 보일 정도로 세련되다. 12권이라는 섬을 구석구석 둘러본 읽는 이는 이 광기의 섬이 20세기 예술이 열망한 그러한 자유로운 상상력의 보물을 간직한 창고와도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은 꿈과 현실, 어린아이와 성인, 광기와 이성 사이의 경계를 더 모호하게 하며 짙은 현대미술의 색채를 드러낸다. 여성 괴물이자 사람을 포함해 만물을 먹어 치우는 입이 강조되는 대상인 스퀼라와 카륍디스는 어딘가 어린아이의 영혼으로 바라본 듯한 문체로 묘사된다. 아직 옷에 가려진 여성의 나체를 보지 못한 어린아이는 미지의 영역을 두려움과 호기심을 품은 채 제멋대로 상상할 수밖에 없고, 겉으로 드러나는 여성의 행위인 손으로 잡고 입으로 먹는 동작을 과장되게 받아들인다는 점은 두 괴물과 소아적 정신의 연관성을 한층 짙게 한다. 이러한 유아적 표현이 에밀 놀데와 같이 인간의 근원을 탐색하려던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을 연상시킨다면, 플랑크타이 바위와 헬리오스의 소들은 의식과 무의식, 광기와 이성 사이를 오가려던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거의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바위라는 육중함과 민첩하게 배들을 부수는 날렵함이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플랑크타이 바위의 이미지가 공중에 뜬 바위를 묘사한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과, 또 배고픔과 목마름 속에서 “껍질들이 땅 위를 기어다니는가 하면 꼬챙이에 꿴 고깃점들이 구운 것도 날것도 음매 하고” 우는 모습을 목격하는 오뒷세우스의 이미지가 초현실적으로 바닥에 놓인 소고기들을 그린 살바도르 달리의 요리책과 연관이 없다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귀향. 9권부터 12권까지 도전, 실존, 반성, 광기라는 굵직한 섬들을 여행한 읽는 이는 이제 오뒷세우스와 함께 이타케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13권부터 16권까지 오뒷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를 감춘다. 그는 아테나 여신에게도 정체를 감추고 “가혹한 자여, 꾀 많은 자여, 계략에 물리지 않는 자여! 그대는 그대 자신의 나라에 와 있으면서도 그대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기만과 교언을 그만두려 하지 않는구나.”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에게도 아들 텔레마코스에게도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이는 아테나 여신이 칭찬했듯 오뒷세우스의 신중한 면모를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서 수차례 활용했던 ‘인간의 모습으로 변장한 신’의 모티브를 암시하면서 이 수법을 더 높은 차원의 문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한다. “나그네여! 그대보다 못한 사람이 온다 해도 나그네를 업신여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모든 나그네와 걸인은 제우스에게서 온다니까요.” 바로 네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알라는 메시지이다. . 요한복음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가에서 물을 길으며 대화가 나누었던 상대가 유대 민족의 메시아이자 절대자임을 알게 된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무시하고 겁박하던 사람들은 자신이 신을 건드렸음을 알고 두려움에 떤다. "톨스토이 단편선"의 핵심을 구성하는 착상 역시 ‘모든 이웃은 사실 그리스도일 수 있다’라는 간결하지만 묵직한 명제이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이자 이타케의 왕인 오뒷세우스가 마치 아테나나 헤르메스처럼 신분을 감추고 나그네로 행세할 때 호메로스는 읽는 이에게도 ‘너는 너 앞에 누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라는 준엄한 경고를 남긴다. 이 경고는 이 세상 어딘가에는 반드시 설명될 수 없는 신비가 서려 있다는 "오뒷세이아"의 전반적인 확신과 합쳐져(4권에서 악취를 풍기는 해변의 노인은 바다의 지혜를 품은 신이었다. 10권에서 단순한 여자에 불과했던 키르케는 지팡이를 휘두른 후에야 비로소 마법사라는 본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모든 타자를 ‘신’으로 간주하는 삶을 살라는 조언으로 이어진다 : ‘네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 알라’ 재회. 아직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타케에서 걸인에 불과했던 오뒷세우스는 16권에서 텔레마코스와 재회하면서 ‘텔레마코스의 아버지’가 된다. 이후 17권부터 23권까지 오뒷세우스는 차례차례 자신을 알아봐 줄 타자들과 재회하며 정체성을 회복한다. 아르고스가 그를 알아보는 대목은 "오뒷세이아"에서 가장 서정적이다. 이후 집에서 가장 미천한 개 다음으로 낮은 존재인 늙은 유모가 오뒷세우스를 알아본다. “노파는 그의 다리를 잡고 두 손으로 씻어 내리다가 바로 이 흉터를 감촉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노파가 갑자기 그의 발을 놓아버리자 그의 장딴지가 대야에 떨어지며 청동 그릇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쪽으로 기울며 물이 바닥으로 엎질러졌다.”유모와의 재회로 ‘집안의 주인’ 지위를 회복한 오뒷세우스는 구혼자들을 모조리 죽이며 ‘이타케의 왕’이 되고, “이 개 같은 자들아! (중략) 너희는 넓은 하늘에 사시는 신들도 후세에 태어날 인간들의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제 너희 모두의 머리 위에 파멸의 밧줄이 매여 있도다.” 23권에 이르러서는 페넬로페와 재회하며 마침내 그는 ‘페넬로페의 남편’이라는 이름까지 되찾는다. . 그러나 호메로스는 이러한 재회들이 ‘아버지, 주인, 왕, 남편’이라는 오뒷세우스의 관계적 속성만을 복원시키는 반면, ‘오뒷세우스’라는 주체의 정체성은 결국 고향까지 돌아오는 기나긴 여정 자체에서 정의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령 퀴클롭스의 섬에서 “퀴클롭스! 필멸의 인간들 중에 그대의 눈이 치욕스럽게 먼 것에 대해 묻는 이가 있거든 그대를 눈멀게 한 것은 이타케의 집에서 사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도시의 파괴자 오뒷세우스라고 말하시오!”라고 무모하게 자아를 주장하던 오뒷세우스는 바다에서의 고난을 겪은 후 “참아라, 마음이여! 너는 전에 그 힘을 제어할 수 없는 퀴클롭스가 내 강력한 전우들을 먹어치울 때 이보다 험한 꼴을 보고도 참지 않았던가!”라고 자아 표출의 욕망을 억제하며 더 성숙해진 면모를 드러낸다. 23권 300-342행에서 오뒷세우스가 아내에게 자신의 모험담을 들려주는 장면은 오랜 그리움을 푸는 부부의 정경이기도 하지만, 사실 오뒷세우스가 막강한 폴뤼페모스에게 도전하고 예측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실존적 선택을 내리며 저승이라는 극한에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광기의 세계로부터 돌아온 자기 자신과 재회하는 대목이라고 보아야 한다. 오뒷세우스는 오뒷세우스 자신과 재회하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마침내 답하는 것이다. 다시, 출항. 오뒷세우스를 따라 "오뒷세이아"를 때로는 매우 급하게, 때로는 여유롭게 항해하며 인류 사유의 풍요로운 열매들을 상상하고 수확한 읽는 이는 이제 오뒷세우스처럼 배에서 내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과 재회해야 한다. 그러나 오뒷세우스의 항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테이레시아스는 나더러 손에 맞는 노 하나를 들고 바다를 전혀 모를뿐더러 소금 든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를 때까지 인간들의 수많은 도시로 가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오.” (23; 267-270) 바다라는 인생을, 인생이라는 바다를 모험하고 돌아오는 24권의 대서사시를 끝내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결말은 없을 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 숨겨져 있을 보물을 찾아 끝없이 항해하지만, 보물을 찾은 후에도 수평선 너머로 나아가는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의 주인공처럼, 오뒷세우스는 평화로운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산전수전을 겪어 귀향한 후에도 다시 평화로운 일상을 실현하기 위해 바다로 나아간다. 24권에서 그 출발은 묘사되지 않는다. 읽는 이가 책장을 덮은 후에야 그는 다시 출항할 것이다. 그리고 책장을 덮은 이 역시 오뒷세우스처럼, 다시 다른 책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출항해야 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정말 호메로스의 마지막 작품이었다고 믿고 싶다.
아르신
4.5
아무리 우려내도 여전히 진한 떠났다가 돌아오는 이야기
천성식
4.0
양장본 몇 권의 책값이 월급을 상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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