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맥락에서 재조명하는 알프레트 아들러의 삶과 격동의 시대
프로이트와의 결별 이후 개인심리학의 정립까지
아들러의 삶의 여정을 가장 치열하고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1930년대 이후 미국에서의 삶 집중 조명
한때 서점가에 불었던 아들러 열풍도 사그라드는 추세다. 아들러 심리학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책이 나오면서 다소 생소한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이자 정신의학자 알프레트 아들러가 사람들에게 친숙한 인물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아들러와 그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이 책은 알프레트 아들러라는 인물과 그의 개인심리학 이론을 새롭게, 그리고 깊이 있게 다룬다. 아들러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전기인 이 책은, 현장 심리학자이자 전기 작가로 미국 예시바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중을 상대로 긍정 심리학에 대한 강연을 펼치고 있는 에드워드 호프먼 교수의 저작이다. 그가 1994년에 쓴 이 책은 아들러의 전생애를 한 권에 담고 있으며,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이론이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첫 등장과 발전까지의 과정을 모두 보여준다. 개인심리학은 아동의 열등감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열등감의 자극은 전반적인 심리학적 움직임이 열등감을 보상하거나 또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총력을 기울이게 한다. 이 타고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아동은 인정받고 격려받는다고 느낄 필요가 있다는 게 아들러 개인심리학의 핵심이다. 따뜻하고 다정했던 정신의학자는 우리에게 인간은 사회적 감정, 즉 동료애, 동지애, 우정, 공동체, 사랑을 위한 능력을 타고났으며, 삶에서 중요한 것은 성적 욕구가 아니라 삶의 초기에 느끼는 무력감과 열등감이라는 것을 일러주었다.
아들러의 아들을 감동시킨 유일무이한 전기
이 책의 서문은 알프레트의 아들 정신의학자 쿠르트 아들러가 직접 썼다. 아들러와 관련된 저작은 많이 나와 있지만, 대부분 아들러와 프로이트의 초기 관계와 뒤이은 결별 등 이런저런 이야기에만 집중되어 있거나 아동, 성인, 가족과 관련된 이론과 치료 기법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쿠르트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 『아들러 평전』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아들러)와 아버지가 살았던 시대를 생생하게 그려낸 최초의 본격적인 전기”다. 이 책은 아들러의 인생사뿐 아니라 그가 직접 만났던 수천 명의 사람과 현대 심리학 전체에 영향을 미친 위대한 심리학자로서 성장한 이야기들을 모두 담았다. 프로이트와의 관계 등 지엽적인 내용에만 매진한 다른 책들과 차별적으로, 호프먼 교수는 특히 미국에서의 아들러의 경력까지 자세하게 서술했다. 평생을 ‘프로이트의 추종자’로 불리며 쌓였던 아들러에 대한 오해가 이 책을 통해 풀린다. 또한 처음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무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아들러의 미국에서의 생활을 상세하게 알렸다. 아들러의 개념들을 알기 쉽게 소개하는 것 외에도 아들러의 생애를 의미 있는 역사적 맥락에서 제시한다는 점에서 역시 특별하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아들러와 그의 삶, 격동의 역사를 모두 만나보게 될 것이다.
빈에서 보낸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 빈은 오랫동안 유럽의 자연적 관문이자 전략적 요충지로서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왔다. 음악 수도라는 국제적 명성을 얻으며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뛰어난 음악가들이 이곳에서 만인을 매료시켰지만, 유대인 등 여러 소수집단의 입장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억압적이었다. 그러다 1848년 민중 혁명이 일어났다. 유대인에게 부과되었던 특정 제약들이 해제되었다. 반유대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진보적인 시각 덕분에 1860년 약 6000명이었던 빈의 유대인 인구는 1900년에는 거의 15만 명으로 치솟았다. 세기말 빈으로 몰려든 헝가리인 유대인 가운데 알프레트의 친할아버지 시몬 아들러가 있었다. 시몬의 둘째 아들이었던 알프레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지적인 요구도 별로 없는 곡물상이었다. 알프레트의 어머니 파울린은 근면한 어머니이자 주부였다.
그들의 둘째 아들이었던 알프레트 아들러는 1870년 2월 7일 빈 부근의 루돌프스하임에서 태어났다. 아들러에게는 형 지크문트(1868년생), 동생 헤르만, 루돌프, 이르마, 막스, 리하르트 등 총 일곱 남매가 있었다. 아들러는 자신의 심리학적 접근 방식이 어린 시절 덕분이라고 언급하곤 했다. “늘 친구들에 둘러 싸여 있었고 인기가 많았다,” “개인심리학의 핵심적 동기가 된 협력의 필요성을 이해하게 된 것은 아마 타인들과의 이런 유대감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린 알프레트에게 형 지크문트는 만만찮은 존재였다. 똑똑하고 고압적이던 지크문트는 알프레트를 툭하면 궁지로 몰았고, 늘 그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다. 구루병 등 여러 질병을 겪었던 알프레트와 달리 지크문트는 아주 건강했다는 점 또한 좌절에 한몫했다. 이후 알프레트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동생 루돌프가 디프테리아라는 병에 걸려 함께 자던 알프레트 옆에서 세상을 떠났다. 얼마 후, 알프레트 역시 폐렴에 걸려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들었고, 기적적으로 회복한 알프레트는 이 일을 계기로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아들러는 이후에도 레오폴트슈타트, 헤르날스, 베링 등 여러 지역을 옮겨가며 살았다. 레오폴트슈타트는 당시 유대인 민족색이 가장 강한 지역이었는데, 그에게는 유대인 혈통에 대한 긍지가 없었다. 알프레트의 부모는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는 수단으로서 교육을 중시했고, 그들의 아들이 엘리트 직업에서 선망받길 바랐다. 그렇게 알프레트는 평판 좋은 김나지움(사립 중등학교) 두 곳에서 8년의 시간을 보내고 빈대학 의예과에 합격했다. 아들러는 처음부터 개업의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빈대학 교수들은 치료보다 실험주의와 진단의 정확성을 강조했고, ‘치료적 허무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무정함은 알프레트의 동기와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아들러는 매일 저녁 카페 그린슈타이들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토론하기를 즐겼다. 그렇게 세 번의 자격시험을 겨우 통과하고, 아들러는 빈 폴리클리니크에서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게 되었다. 아들러는 사회주의에 강하게 끌렸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통해 지적인 흥분을 느꼈다. 경제 이론과 분석보다는 구체적인 사회적 행동에 의해 인간의 삶이 향상될 수 있다는 사회주의의 낙관적 견해에 훨씬 끌렸다.
결혼, 그리고 의사로서의 삶을 살다
1897년, 아들러는 인생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사랑에 빠졌다. 라이사 티모페이브나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러시아식으로 양육된 똑똑한 유대인이었다. 아들러는 라이사에게 완전히 빠졌고,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그러나 따로 조직 활동이 없었던 라이사는 러시아의 가족과 친지들을 그리워하며 외로워했던 듯하다. 첫째 발렌티나, 둘째 알렉산드라, 셋째 쿠르트, 넷째 코르넬리아가 태어나면서 아들러와 라이사 사이에는 서서히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아들러는 자녀들의 기억에 헌신적인 아버지로 남았다. 알렉산드라에 따르면, 아들러는 늘 바빴지만 아이들이 부모를 필요로 할 때 늘 곁에 있어주었다. 또한 자녀들의 직업을 좌지우지하지 않았고, 자식들에게 고압적으로 굴지도 않았다. 알렉산드라와 쿠르트는 정신의학자가 되었고, 발렌티나는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유일하게 코르넬리아만 연극배우가 되었다.)
아들러는 얼마 뒤 내과를 개업했고, 환자를 치료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곧 좋은 평판을 얻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아들러는 신체와 정신 사이에 숨어 있는 신비한 결합관계를 진지하게 탐구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기관열등감organ inferiority’ ‘보상compensation’ ‘과잉보상’이라 불리게 된 용어들이 이때 처음 만들어졌다. 정치적으로 기독사회당이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아들러는 사회민주당에 결속감을 느꼈고, 그의 첫 번째 전문서적 『재봉사를 위한 건강 지침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