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광주를 기억한다는 말이야말로 정작 광주를 잊게 하는 것이 아닐까.
사진가 노순택이 포착한 광주의 기억,
그리고 그 이면의 망각이 만들어내는 불편하고 서늘한 풍경들.
노순택의 사진집 <망각기계>는 기억과 망각의 관계에 대해 적극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다. 80년 5월의 광주는 공식적으로는 종결된 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광주의 기억이 공적인 영역으로 들어오고, 민주화를 위한 위대한 항쟁으로 인정되는 순간 정작 잊혀지는 것들이 있다. 죽은 이들을 단순히 '민주화의 투사이자 희생자'로 간주하는 순간 우리는 편한 마음으로 죽은 이들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이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광주의 기억들은 충분히 기억되고 애도된 것인가?
노순택은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진가이자, 언제나 정치적으로 첨예한 현장을 벗어나지 않는 현장 사진가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전형적인 틀을 넘어 예술에 가장 사진을 찍는다. 그는 광주의 기억이 지금-여기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사진을 통해 검토하려 한다.
그는 광주를 둘러싼 기억과 망각의 풍경을 통해, 우리는 광주를 기념하는 것을 통해 그 죽음을 쉽게 결론지어버리려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닌가 묻는다. 어떤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다른 기억을 망각하겠다는 것이다. 노순택은 기억의 강력한 도구라고 흔히 알려진 사진을 통해 정작 광주가 망각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결국 노순택의 사진은, 우리의 일상이 지닌 이면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문제와 광주의 기억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있다.
대체 이 사진집은 무엇인가
이 책은 80년 5월 광주의 기록사진집이 아니다. 광주에서 죽은 이들과 그 유족들의 남겨진 삶을 보여주는 서글픈 사진을 담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 사회가 ‘민주화 유공자’를 푸대접한다고 고발하거나, 가해자의 기세등등함을 보여주며 그들을 다시 법정에 세우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르포르타주도 아니다. 이 사진집에 담겨 있는 것은 망월동 구묘역에 놓여 있는 낡은 영정사진들과, 거리에 나와서 팻말을 들고 악을 쓰는 사람들, 묘비에 참배하는 정치인들과 풀밭에 놓여 있는 꽃, 손으로 깎아 만든 돌부처와 오래된 건물의 내부 같은 것들이다. 이를 담은 사진들은 하나같이 괴이하다. 사람들은 괴로워 보이고 어딘가 뒤틀려 보인다.
노순택은 지금 여기, 우리 사회에서 80년 5월 광주의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는 망월동 구묘역에 놓여 있는 영정사진들이 비바람에 바스러지고 ‘늙어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 추모 행사에 몰려드는 정치인들과 묘비를 붙잡고 울음을 터트리는 유족들, 그들을 집요하게 찍는 사진기자들, 어느새 그날의 죽음이 ‘민주화를 위한 거룩한 희생’으로 대접받고 있는 모습을 냉정하고 건조한 카메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광주의 기억은 실로 다양한 용도로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광주의 기억은, 이것으로 정말 충분한 것일까
과거란 참으로 먹먹하고 거대한 시공간이어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한국의 과거를 영광스럽게만 재구성한다면, 도저히 재현될 수 없는 역사의 순간들이 있다. 예를 들면 80년 5월, 광주라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그러하다. 한국의 현대사를 ‘선진국을 향하는 위대한 도정’ 같은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광주에서 벌어졌던 일을 도대체 속 시원히 설명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진국이 되기 위해 사람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고,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선진국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광주에서 벌어진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민주화를 위한 항쟁이었는가, 아니면 북한의 사주를 받은 일부 공산주의자들에게 촉발된 우발적인 폭동이었는가. 혹은 국가가 국민에게 가한 부당하고 일방적인 학살이었는가, 아니면 단지 ‘불미스러운 사고’였는가. 광주는 권력이 바뀔 때마다 다르게 기억되었고 ‘공식 기억’이 되지 못한 기억들은 망각될 것을 강요받았다. 결국 기억한다는 것은 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은 광주에 대한 기억의 싸움은 ‘공식적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고, 정치인들은 매년 망월동에서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죽임을 당한 이들에게 ‘민주화의 투사’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으로 광주는 과연 종결될 수 있는 것인가. 사실 우리가 광주를 기억한다고 말하는 행위는, 광주에서 벌어졌던 죽음의 참혹함을 산 자를 위한 기념비로 바꾸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광주의 기억은 이것으로 충분한가. 죽음은 충분히 위로받은 것인가. 아마도 노순택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사진의 구조를 탐색하는 나직하고 무거운 질문들
노순택의 사진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순수 사진’의 계보에 속하지도 않고, 다큐멘터리 사진의 분류에 거하지도 않는다. 일반적인 의미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이 사진의 유족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아물지 않은 슬픔을 찍으려 했을 것이다. 아니면 하다못해 묘역의 관리 상태를 고발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희생당한 이들을 국가와 사회가 과연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다. 이런 사진들이 던지는 질문은 매우 정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오히려 탈정치적이다. 질문들의 답이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답이 정해져 있는 어떤 질문도 예술이 아니다.
하지만 노순택의 사진들은, 단순하고 건조하게 광주의 기억이 만들어내는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진은 강력한 기억의 수단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망각의 기계다. 이 사진들은 우리로 하여금 사진을 통해 과거를 서술하고 역사를 기록한다는 식의 통념에 대해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지금도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근대 다큐멘터리 사진의 신화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포함한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예술의 재현은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옳은가?
이런 꽉 막힌 질문을 던지면서도 미적 긴장감을 놓지 않는 작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국 사진사에는 아직 없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노순택이 개인적으로 이루어낼 성취는, 곧 한국 사진이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성취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