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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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기, 그것은 곧 혁명 “사랑의 재발명 없이 다른 세계, 더 나은 세계를 제대로 상상할 수 없다” 20세기 혁명의 역사가 쓰인 곳곳을 거닐면서 그 주역들에게―레닌과 체 게바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울리케 마인호프에 이르기까지―사랑에 대해 얼핏 보기엔 순진한 질문을 던진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왜 레닌이나 체 게바라 같은 가장 급진적인 혁명가들이 사랑의 급진성을 두려워했을까? 겉보기에 온건한 사랑의 개념에 대해 왜 그렇게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는가? 왜 온건하지 않은가? 러시아 10월혁명의 성혁명과 그 이후의 억압, 사랑과 혁명적 헌신 사이에서 갈등한 체 게바라의 딜레마 그리고 68운동의 기간과 그 여파를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저자는 이 질문들에 답한다. 이 짧은 책은 사랑의 문제가 흥미롭고도 놀라울 정도로 실종되어 있는 현재, ‘사랑의 급진성’이 왜 중요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며 답을 찾아가고 있다. 흔히 사랑은 사적 영역에 속한 것으로서 공적 영역에 속한 정치와는 구분된다고 또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저자는 성적 욕망으로 팽배한 현대사회, 사랑을 외면한 과거의 혁명들 그리고 오로지 성해방만을 내세운 저항 사례를 각각 살펴보면서 사랑과 욕망 없는 정치 그리고 사랑 없이 욕망의 해방만 내세운 저항의 위험성을 말한다. 사랑은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극명하게 발견하는 폭력적인 경험이지만 아울러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게 해준다. 저자에 따르면, ‘사랑에 빠져듦’은 “결과가 어떻든 간에 위험을 무릅쓰는 것, 이 숙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일상의 좌표가 변경되리라는 점을 알면서도, 오히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만남을 갈구하는 것”이다. 사랑과 정치가 연결되고 사랑의 진정한 급진성을 찾을 수 있는 여지는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자기애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으로 ‘재발명’되지 않는 한, 시위도 축제로 끝나버리고 만다. 시위자들이 다중과 함께한 경험에만 만족하고 그친다면 어떤 변화도 이끌어낼 수 없다. 이는 2016년 한국의 촛불집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집회가 일상에서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다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저 순간의 자기만족과 즐거움에 그치고 말 것이다. 저자는 이란혁명, 레닌과 콜론타이의 토론, 체 게바라의 혁명, 68혁명 당시의 ‘코뮌 1’의 실험 등을 살펴보면서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몇몇 연대 행위에서 ‘사랑의 재발명’을 통한 다른 사회의 가능성을 본다. 2015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유대교 회당 공격을 규탄하며 인간 방패를 만들어 유대인 공동체를 보호하고자 한 이슬람교도들의 행동, 2011년 타흐리르 광장에서 인간 띠를 만들어 무슬림들을 보호한 기독교인들이나 1979년 강제적인 히잡 착용에 반대해 시위에 나선 이란 여성들을 탄압에서 보호하려 한 남성들이 보여준 행동은 종교, 성별 등의 사회적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과 정치가 결합된 사건이었다. 저자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의 급진성’이며 그것이야말로 다른 세계, 더 나은 세계를 제대로 상상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혁명 모두에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급진성이다.” 차가운 친밀성 시대, “사랑은 재발명되어야만 한다” 오늘날 사랑을 얘기할 때면 대개의 경우 그저 섹스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섹스하는 육체’의 시대에 모든 사람은 잠재적으로 섹스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단순한 섹스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재발명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른바 ‘차가운 친밀성’의 시대다. 현대사회에서 만남은 미리 설정한 프로그램을 통해 이뤄진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각종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감정을 가늠해보고, 물어보고,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은 생략된다. 온갖 제품과 혁신기술에 의해 사람들은 그 어떤 시대보다도 투명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안티 소셜 애플리케이션을 만든 개발자 브라이언 무어는 “일반적으로 우리는 항상 너무 많은 정보와 너무 많은 네트워크에 둘러싸인 나머지 사회적 피로감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인 랭보는 “사랑은 재발명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기술시대에 사랑은 실제로 재발명되었는가? 오히려 현대인은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사랑은 아름답고 급진적인 것이 아니라 위험하고 두려운 대상이 되었다. 욕망의 억압, 체제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당신이 이란으로 여행을 떠난다면, 늦은 시각 수도 테헤란에 도착한다면 기이할 정도로 텅 비어 있는 거리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차 한 잔을 즐길 만한 카페도 찾을 수 없다. 1979년 호메이니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설립한 후 거리의 많은 ‘공적 공간’을 없앴기 때문이다. 호메이니는 카페나 카바레 등이 (반)혁명적 행위가 이뤄지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염려했다. 뿐만 아니라 호메이니가 만든 새로운 체제는 건축과 건물 외에 모든 분야에 걸쳐 이란인들의 욕망을 억압하고 있다. 의복, 언어 사용은 물론 음악을 감상할 권리마저 통제 당한다. 이란인들은 고전음악과 전통 페르시아 음악만 들을 수 있고 악기를 연주할 수 없다. 인터넷에서도 시민적, 정치적 내용은 물론 성과 사랑, 섹스, 섹슈얼리티 등의 단어를 검색할 수 없으며 이와 관련된 url주소를 사용할 수 없다. 전체주의 체제에서 욕망은 위협이자 반사회적인 생각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욕망을 억압당하는 상황에서 이란인들은 이중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페르시아어를 쓰는 한편 영어를 쓰고, 몰래 금지된 술도 마신다. 푸코가 이란혁명 시기에 제기한 동일한 질문을 해보자. 오늘날 이란인들은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일부 사람들은 호메이니와 같은 꿈(히잡, 남녀 분리, 풍속 경찰, 순교자 등)을 꾸고, 다른 일부는 팔레비와 같은 꿈(국가가 지배하는 자유 시장)을 꾼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다른 종류의 자유를 꿈꾸고 있다. 이 자유는 카페나 카바레에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만약 이란에서 폭발이 일어난다면 이란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욕망을 규제해온 30년 이상의 과정과 대면해야 할 것이다. 혁명과 사랑을 동시에 이룰 수는 없는 걸까? 20세기 러시아 혁명사로 거슬러 올라가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1917년 10월혁명 초기에는 재산권,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성혁명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법적으로 열등한 여성의 지위를 폐지하고 이혼과 낙태를 허가했으며, 여성들이 결혼한 후에도 재산과 수입에 대한 전적인 통제권을 가지는 것을 허용하는 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1934년 6월에는 동성애 반대법이 소비에트 연방이 재도입되고 낙태가 금지되었으며 이혼법이 갱신되는 등 퇴행했다. 레닌은 혁명 초기 ‘성’과 ‘사랑’에 관심을 가졌지만 결국 ‘섹슈얼리티’가 마르크스주의의 주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젊은이들이 에너지를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쏟기만을 바란 것이다. 물론 레닌이 ‘성’과 ‘사랑’을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성’과 ‘사랑’의 중요성은 인정했지만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나 이네사 아르망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공산주의 혁명은 성·사랑 혁명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혁명을 먼저 성공시켜야 사랑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랑 또는 혁명이냐, 사랑과 혁명이냐? 사랑과 혁명 사이에서 고민한 혁명가는 레닌만이 아니었다.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평생 혁명적 대의와 사랑이라는 감정 사이에서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