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4권. 독일 문단에서 금기시되었던 피란선 구스틀로프호 침몰 사건을 다루어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겼던 문제작. 1945년 1월, 독일 피란민 9000여 명을 태우고 항해 중이던 구스틀로프호는 러시아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 세 발을 맞고 침몰한다. 선장 넷을 비롯해 1000명 남짓만이 살아남은 이 사고의 희생자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 아이들이었다.
독일 문단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불리는 귄터 그라스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다양한 서술 방식으로 다루어 온 작가다. '구스틀로프 호의 침몰'은 신나치주의 확산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이용될 우려가 있는 사건이었다. 귄터 그라스는 정치적 함의나 해석에서 살짝 비켜서서 '게걸음'과 같은 방식으로, 옆으로 걸으면서 느릿느릿하게, 머뭇거리는 듯하지만 이 사건의 모든 면을 살펴보며 나아간다.
이념과 수치(數値) 속에 감춰진 죽음의 표정들, 단 한 측면만을 바라볼 때 일어날 수 있는 역사 왜곡 위험 등에 대해 경고하면서, 역사의 거시적 차원과 그 알맹이를 이루는 개개인들의 삶에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