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려령의 소설은 언제나 신선하고 통쾌하다
세상을 향해 던지는 김려령의 강렬한 물음 “넌 지금 행복하니?”
‘한국문학의 새로운 활력’, ‘비범한 이야기꾼’이라 불리는 김려령 작가가 흡인력 강한 소설로 다시 독자들을 찾아왔다. 신작 장편 『트렁크』에서 작가는 기발한 상상력과 리얼리티 넘치는 명쾌한 화법으로 인간관계와 사랑의 맨 얼굴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심리 전개 대신 재치 있는 대화와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이야기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김려령 작가는 그간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너를 봤어』 등의 작품을 통해 대중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폭 넓은 사유와 개성 넘치는 문체로 우리 삶의 기저에 가닿는 깊이 있는 서사를 구축해왔다. 특히 『완득이』에 이어 두번째 스크린셀러가 된 『우아한 거짓말』 이후 작가는 일상적 삶에 내재된 폭력성을 발견하고 고발하는 데 천착해왔다. 『트렁크』는 이러한 작가의 문제의식이 더욱 공고해지고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엄밀해졌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내게는 세상 전체가 사막이었다. 살아남는 게 오히려 신기하고, 타인의 갈증에 무섭도록 냉담한 곳이었다. 서걱서걱. 나는 한모금의 물이 간절했는데 내 입의 침마저 말렸다. 고개를 숙이면 그 참에 목뼈를 부러뜨리려 했고, 고개를 들면 날선 칼로 목을 치려 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 “뭘 원하시는 겁니까?”
서른살, 다섯 개의 결혼반지
‘이번 결혼에도 사랑은 하지 않았습니다’
김려령이 그리는 결혼과 사랑의 맨 얼굴
한번쯤 결혼해보고 싶은 여자. 그녀는 내가 그 범주에 속한다고 했다. 이제는 배우자도 임대하는 세상이 됐구나. 고액의 연회비와 혼인성사자금을 지불하는 회원들에게, 이런 아내는 어떠신가요? 하고 내미는 기호품이 된 기분이었다. 몰랐고, 끝까지 몰라도 됐을, 모르는 게 더 나았을 그런 세계가, 내 손을 그렇게 잡았다. (26면)
올해 스물아홉살의 주인공 ‘인지’는 결혼정보업체 웨딩라이프의 비밀 자회사인 NM(new marriage) VIP팀에서 입사 육년차 차장으로 일하고 있다. 다른 부서의 사원들이 미혼 남녀의 결혼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것과 달리 인지는 직접 VIP회원의 기간제 부인인 FW(field wife)가 되어주는 업무를 맡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출판사 면접에서 떨어진 날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입사 제의를 받았을 때만 해도 인지는 NM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대학시절, 사랑하는 사람이 동성애자였다는 이유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고 결국 떠나게 만든 어머니에 대한 반감과 취업의 어려움으로 망명하듯 NM에 입사한다.
우리는 애인과 아내 사이에서 그들 생의 한 구간을 함께한다. 시작부터 후회였고 종국에도 후회가 될 것을 알지만, 이 흐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체념이라고 하기에는 내가 가엽고, 신념이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비겁하다. 꽉 막힌 병목구간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빠져나가는 자동차처럼, 언젠가는 나도 이 지난한 삶의 구간을 빠져나가겠지, 기대할 뿐이다. (26면)
네번째 결혼을 마친 인지는 전 남편으로부터 재결합 신청을 받고 다섯번째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종전의 결혼생활에 비해 순탄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인지 앞에 ‘엄태성’이라는 남자가 등장한다. 절친한 친구인 ‘시정’의 부탁으로 휴가기간 중 한번 소개팅을 가졌을 뿐인데, 엄태성은 자신을 단칼에 거절한 인지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호기심을 품고 스토킹을 시작한다. NM보안팀은 인지가 계약 남편과 함께 사는 집까지 집요하게 찾아온 엄태성을 제압한 뒤 인지 몰래 격리시킨다. 이후 그의 행방이 궁금해진 인지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불법으로 납치되어 학대받고 있던 그를 풀어준다. 다섯번째 남편과의 결혼 계약이 끝나는 날 인지는 시정과 함께 절친했던 친구 ‘혜영’이 죽던 10년 전, 도움을 받은 남자가 지금의 남편이었음을 알게 된다. 계약을 끝낸 인지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출장 결혼 내내 함께했던 트렁크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사실 불행했던 자신의 20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서른살 생일을 맞은 인지에게 엄태성이 또다시 접근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늘 내가 만나는 사람만 중요시했을 뿐, 행복하니? 하는 질문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당연 내 불행 따위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사는 게 힘들어요,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어쩌면 그런 무심함에 화가 났던 것도 같다. 괜히 버럭버럭 화를 내서 나만 더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벌써 서른이다.(210면)
나는 그게 궁금한 거야. 왜 내가 싫은지. 갈겨쓰지 않은 정갈한 글씨였다. 미친 새끼. 서둘러 문부터 걸어잠그었다. 몸에 기운이 쏙 빠졌다. 허적허적 뒷걸음질 치다 발이 트렁크에 걸렸다. 본능처럼 트렁크 손잡이를 잡았다. 어떡하지. (…) 내가 그토록 원했던 고요가 그렇게 나를 덮치고 시야를 깨뜨렸다.(211면)
폭력과 부조리로 가득한 삶
그럼에도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를 지나 5포 세대, 7포 세대라는 신조어들이 난무하는 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지난해 인구 1,000명당 혼인율은 통계 산출한 1970년 이후 가장 낮은 기록을 보였고 어렵게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웨딩푸어’, ‘하우스푸어’ 등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가난 때문에 사랑과 결혼이 좌절되는 시대에 김려령 작가가 이번 작품에서 설정한 ‘기간제 부인’ ‘출장 결혼’은 어떤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모습으로 가슴 서늘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어느새 독자들의 마음에 들어 앉아 현실 같은 이야기 속으로 치닫게 한다.
중산층으로 그럭저럭 살다가 회비가 밀리고 혼인성사자금도 없어 자동 탈퇴된 회원도 있다. 미련으로 계속 NM으로 연락하지만 NM의 답변은 간단하다. 법적 결혼을 하세요. 그게 제일 싸게 먹힙니다. 값진 조언도 잊지 않는다. 잘하면 공짜로 눌러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무조건 혼인신고를 하세요. 법적으로 큰소리 칠 수 있고, 한몫 챙기고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그때 다시 얘기하죠.(73면)
『트렁크』는 결혼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여러 관습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해온 작가의 산물이기도 하다. 작가는 결혼과 사랑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형식과 내용을 꼬집고 비틀고 그 이면을 들춰내며 관습이 얼마나 고루한 것인지, 또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지는 현실적 욕망이 얼마나 속물스러운 것인지 이야기한다. 관습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공동체의 규범을 언제나 내포하는데 작가는 계약결혼, 성소수자 등의 소재를 전면에 내세워 이 규범의 이면을 바라보려 한다. 규범을 넘어서려는 이러한 작가의 시선을 ‘비딱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작가의 시선은 이미 비딱해진 세계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다시 폭력에 대해 말한다. 타인의 삶에 무책임한 호기심을 갖고 개입하는 것 자체가 거대한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나아가 타인의 삶에 간섭하고 영향력을 끼치려는 욕망이 결국 자신의 삶을 그르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사랑’의 어두운 이면인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결국 다시 사랑에 서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끌어안으며 연민한다.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 않는 사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