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 Novel/Action
4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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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스터리 소설의 그랜드마스터로 칭송받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장면마다 긴장감이 넘치면서 속도감 있게 읽히는 페이지 터너(숨막힐 듯이 재미있는 책)라는 평을 받았다. 잔혹한 현대 사회의 일면을 직설적으로 폭로한 소설로, <자본론>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자의 처지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기업의 탐욕과 대폭적 인원 삭감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도끼'를 뜻하는 '액스(The Ax)'는 은유적으로 '해고, 면직, 감원 대삭감' 등을 나타내는 말로, 정리 해고 사태로 직장을 그만두게 된 주인공이 재취업을 위해 벌이는 괴상한 음모와 살인 행위가 이 책의 주요 모티프이다. 작가는 한 중산층 남자가 해고로 인해 어떻게 피폐한 삶으로 전락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재취업을 위해 어떻게 경쟁자들을 제거해 나가는지 두 축의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버크 데보레는 23년간 제지회사의 일해온 평범한 중산층 남자이다. 어느 날 회사가 캐나다의 제지회사와 합병되면서 하루아침에 정리해고 되고 만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건 딱 한 가지, 일자리뿐이다. 그는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자신의 인생과 절망에 상처 입은 영혼을 복구하기 위해 오늘도 인간 사냥을 나선다. 버크 데보레는 어느 날 잡지에 가짜 구인 광고를 낸다. 그의 사서함에는 경쟁자들의 이력서가 가득 쌓인다. 데보레는 자신보다 더 능력 있고 젊고 잘생긴 다섯 명을 추린다. "내가 인사 담당자라면, 이 자들을 뽑겠지?" 이제 이 다섯 명이 없어져야 자신이 살 것이다. 한없는 무력감과 과장된 희망 사이를 오가면서, 데보레는 자신의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에 의해 영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2005)로 만들어졌으며 박찬욱 감독에 의해 영화로 리메이크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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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박찬욱이 차기 작품으로 꼽고 있는 소설이 출간되었다. 미국 미스터리 소설의 그랜드마스터로 칭송받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액스』는 장면마다 긴장감이 넘치면서 속도감 있게 읽히는 페이지 터너(숨막힐 듯이 재미있는 책)라는 평을 받았다. 잔혹한 현대 사회의 일면을 직설적으로 폭로한 이 책은 박찬욱 감독이 미국 현지에서 제작중인 [스토커] 이후 차기 작품으로 선택한 원작이다. <자본론>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자의 처지를 정확하게 묘사한 이 책은 탄탄한 구성과 신랄한 문제의식으로 독자들을 휘어잡는다. 산산이 깨져버린 꿈 옳고 그름은 없다. 오직 불편한 현실만이 있을 뿐! 『액스』는 기업의 탐욕과 대폭적 인원 삭감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도끼’를 뜻하는 ‘액스(The Ax)’는 은유적으로 ‘해고, 면직, 감원 대삭감’ 등을 나타내는 말로, 정리 해고 사태로 직장을 그만두게 된 주인공이 재취업을 위해 벌이는 괴상한 음모와 살인 행위가 이 책의 주요 모티프이다. 작가는 한 중산층 남자가 해고로 인해 어떻게 피폐한 삶으로 전락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재취업을 위해 어떻게 경쟁자들을 제거해 나가는지 두 축의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이 책은 자본주의가 낳은, 더 정확히 말하면 신자유주의와 경쟁지상주의가 낳은, 슬픈 비극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이야기의 한 축인 중산층 가정의 몰락 과정을 다룬 대목을 현실에서 자주 목도하게 된다. 신문 보도를 보더라도, 대개는 이러한 몰락 과정에서 회사나 가정, 혹은 불특정한 대상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거나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울화로 치닫는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서 이야기의 다른 한 축을 아주 기묘하게 이끌어간다. 즉, 재취업을 위해서 자신의 경쟁자들을 제거해 나간 것이다. 현실에서는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이런 도발적인 상상과 위험한 설정을 통해 문제제기를 한다. 작가는 이런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만일 나의 재취업 경쟁자인 다섯 명이 사라진다면? 나보다 조건이 낫고 취업 가능성이 높은 그들에게 내 일자리를 뺏기지 않으려면?”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굶어 죽으나 매 맞아 죽으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라면 사람은 누구나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웃집 담을 넘든지, 강도와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악한 본성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악랄함과 추악한 본성을 보여준 사례는 영화 <엑스페리먼트>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전세계가 경악했던 이 영화의 감옥 실험은 1971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진행됐다. 실험 당시 24명의 신청자들은 아무 조건 없이 죄수와 간수로 역할을 나누어 감옥에 갇힌 채 생활했다.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도관들은 죄수들에게 점점 심한 학대를 가했고, 죄수들이 정신적 이상을 보여 실험 시작 5일 만에 강제로 종료했던 사건이다.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관찰한 이 실험은 몇몇 피실험자의 극단적인 돌출행동으로 종료됐다. 따라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그리고 이 사회와 자본주의체제에 대해 아주 강한 메시지를 담은 은유 하나를 던진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성경에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는 전언과 맞닿는다. 이는 누구나 살면서 겪게 될 문제인 것이다. <액스>는 ‘모가지’다 박찬욱 감독은 추천의 글에서 제목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곤란하다고 말한다. ‘액스’가 ‘도끼’의 뜻을 갖고 있으니, ‘도끼 들고 법석 떠는’ 소설이라 생각되지만, 실제로 이 소설에 ‘도끼’는 등장하지 않는다. ‘해고’를 뜻하는 한국어의 대표적인 은어는 ‘모가지’이다. 그러므로 박찬욱 감독이 영화의 제목을 가칭 '모가지'로 정한 것은 이 작품이 풍기는 정서를 직설적으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영어나 한국어에서 미묘하게 다르지만, 결국은 “해고는 죽음”이라는 현실의 절망을 담고 있다. 실제로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한국 사회에서도 대량 해고가 재앙처럼 닥쳐왔다. 2008년에는 전 세계에 몰아닥친 금융위기 이후 실업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가 대두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해고’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아닌가”라고 감독은 말한다. 비틀린 욕망으로 가득한 현대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 이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버크 데보레의 고백이 나온다. 그 고백은 불편한 현실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 발버둥쳐 온 한 중산층 남자의 마지막 이력서이다. 내 이름은 버크 데보레다. 쉰한 살이고, 코네티컷 페어본 페너리 우즈가 62번지에 살고 있다. 실직 상태로 지난 2년을 보냈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군대에 다녀온 후 지금껏 단 하루도 일을 쉬어본 적이 없었다. 실직 상태가 길어지니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평소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까지 척척 해내게 됐다. 업계지에 가짜 구인광고를 싣고 나와 같은 처지의 실직자들로 하여금 이력서를 보내게 만들었다. 내 경쟁자들 말이다. 난 그 이력서들을 꼼꼼히 훑어본 후 나보다 나은 자격과 조건을 갖춘 이들을 추려 차례로 죽여 나갔다. 그들에게 내 자리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일하고 싶었다. 그 갈망이 나로 하여금 이런 미친 짓을 벌이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총 네 명을 죽였다. 첫 번째 살인은 보름 전에 저질렀다. 5월 8일 목요일에. 내가 죽인 사람의 이름은 허버트 C. 에벌리였다. 난 코네티컷 폴 시티의 처치워든 레인 가에 자리한 그의 집 앞에서 그를 총으로 쏴 죽였다. 두 번째 희생자는 에드워드 G. 릭스였다. 난 그만을 표적으로 삼았지만 그의 아내가 날 자신의 어린 딸과 부정한 짓을 저지른 사람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그녀까지 죽이게 됐다. 난 지난 목요일에 매사추세츠 롱홈에 자리한 그들의 집에서 그 일을 벌였다. 마지막 희생자는 어젯밤 뉴욕의 리치게이트에서 봉변을 당했다. 그의 이름은 에버릿 다인스였고, 내 차에 치어 숨졌다. 정말 후회스럽다. 내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들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유족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다. 나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겐 더 미안하고. 난 나 자신을 증오한다. 이 미친 짓을 계속해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게 내 고백이다. 누군가가 이런 고백을 한다면, 그는 이미 죽음 문턱까지 왔거나 넘어본 사람일지 모른다. 혹은 굶어 죽기 싫어서 매 맞아 죽기를 택한, 인간 본성의 악함에 충실한 캐릭터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 끔찍스러운,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연쇄살인범의 행위에 모두가 동의는 못할망정, 그의 내밀한 독백에는 누구나 돌을 던질 수 없게 된다.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이 끔찍한 현실은 바로 윤리의 잣대로 선과 악을 가를 수 없다는 세상의 부조리에서 시작되고 끝맺는다. 어쩌면 주인공의 살인 행각이 발각되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의 끝에 이르면 연쇄살인의 결론이 맺어진다. 그러나 데보레가 범인으로 드러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작가가 작품 속의 데보레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미 드러났다. 미국식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적인 경쟁지상주의가 이 체제를 살아가는 이들을 죽음의 시스템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 데보레가 시민교육을 제대로 받았었고, 해직 후에 사회안전보장망을 통해 기본 생존권을 누렸고, 재취업을 위한 재교육 기회를 부여받는 유럽식 사회복지 체제에 있었다면, 이런 현실과 다를 것인가? 물론 작품을 통해서 해명되지 않을 부분이긴 하지만, 적어도 작가는 이러한 질문을 이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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