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신들은 여신이었다. 당신은 기억하는가?”
무의식 깊은 곳, 잃어버린 여신성을 깨울 신화학의 고전
“이 책에서 강조하는 메시지는 제임스 조이스가 ‘악몽’이라 진단했던 지난 5000년의 짧은 인류 역사 이전에, 지금과 전혀 다른 4000년의 역사가 실존했다는 점이다. 이 기간은 자연의 창조적 에너지와 부합하는 조화와 평화의 시기였다. 이제, 전 지구가 ‘악몽’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
-조지프 캠벨의 추천사에서
수많은 독자들에게 재출간 문의를 받은 책 《여신의 언어》가 복간되었다. 이 책은 가부장제가 확립되기 이전 선사시대의 종교, 사회, 이데올로기, 문화를 밝혀낸 독보적이고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1989년 출간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킨 뒤 다양한 사상과 연구, 문화 콘텐츠에 영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를 원류로 삼아온 서구 문명에서 여신 중심의 모계 사회가 먼저 실재했다는 사실과 이를 뒷받침하는 방대한 유물들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버드대학에서 고고학 연구자로 첫발을 내디딘 저자 마리야 김부타스는 당시 학내 유일한 여성 고고학자였다. 학계의 전통과 조류를 따라 10여년 이상 각종 무기 유물을 분류하며 전쟁 문화를 연구하던 그는 ‘전쟁’과 ‘지배’의 논리로 인류를 설명하는 관점에 회의를 느끼며 다른 질문을 품게 된다. “인류 역사에 전쟁은 정말 불가피했을까? 또 그 역사 속에 여성들은 어디에 있는가? 인류 문명 내내 남자가 여자를 지배했을까?” 그가 역사시대 이전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 이유다.
이후 수십 년간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유물 발굴 작업에 더욱 매진하게 되었고, 비교 신화, 초기 역사 자료, 언어학, 민족지학, 민속학을 아우르는 학제 간 연구로 유물에 새겨진 문양의 상징과 의미를 분석하고 내재된 질서를 발견하는 데 몰두했다. 그 결과 가부장제 이전 인류 공동체의 삶에 여신 숭배와 대지 중심 문화가 실재했음을 밝혀냈다. 수천 가지 유물 도상으로 해석한 고대 모계 사회는 “위계가 아니라 평등, 초월이 아니라 임재, 단일이 아니라 다양함, 멈춤과 고착이 아니라 리듬과 변화, 우세와 지배가 아니라 조화”(xxvi쪽)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였다.
김부타스 이전에 역사학자 바흐오펜(1815~1887)도 인류 초창기 모권 중심 사회에 대해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러나 김부타스의 관점은 그와 달랐다. 바흐오펜이 모권제 사회에서 가부장제 사회로의 전이를 인류의 진화로 보았던 반면, 김부타스는 남성 중심 문명이 인류의 기나긴 시간 속에서 오히려 일시적인 것이며 거기서 파생한 전쟁과 지배의 문화는 병리적 현상일 뿐이라고 말했다.(xxv쪽) 인류는 역사시대 이전 더 오랜 기간을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았으며, 여신 전통의 흔적이 이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남성 중심, 문자 기록 중심의 기존 학계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내용이었음에도 1970년대에 들어 학계에서는 본격적으로 여신 연구가 활기를 띤다. 특히 역사시대 여신 이미지들 역시 가부장제 영향 아래 있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연구의 초점을 선사시대로 옮기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모두 1950년대부터 시작된 김부타스의 연구를 기반으로 하는 작업이었다. 조지프 캠벨이나 레너드 쉴레인과 같은 학자들도 원시 인류의 여신 관련 연구는 전적으로 김부타스의 연구를 참고했다고 밝혔고, 페미니즘 제2물결을 주도한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정신분석가 진 시노다 볼린 또한 김부타스의 연구를 중요하게 평가했다. 오늘날 널리 시도되는, 신화 속 여신을 남신의 어머니, 아내, 딸로 호명하는 대신 더욱 주체적인 서사를 부여해 재해석하는 시도들 역시 김부타스의 업적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2000여 가지 유물 도상이 복원하는
1만 년 전 여신 문명 사회
선사시대(특히 신석기 시대까지) 신상의 90퍼센트는 여신상이다. 가장 오래된 인간 형상 조각상으로 널리 알려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도 이 시기의 유물이다. 여신의 의미를 풍요와 다산으로만 한정해온 그간의 논의와 달리 김부타스가 밝혀낸, 땅과 달을 비롯한 자연 만물에 친연성을 갖는 이 시기 상징들의 주요 주제는 탄생과 죽음(파괴), 재탄생이다. 생명과 탄생 역시 여신 문화의 중요한 테마지만, 모성으로만 여신의 힘을 설명하는 것은 당대의 여신성(여성성)을 축소 해석하는 관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 세계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 위계가 없고, 여신들은 남신의 개입 없이 혼자서 생명을 잉태하고 죽음을 초래한다. 토양과 자궁의 색인 검은색이 생명력과 연결되고 뼈의 색인 흰색이 죽음과 파괴의 의미를 내포한다. 여신들은 행운을 가져오고 예언을 내리고 맹금류처럼 울부짖고 맹독성 뱀이 되어 기어오른다. 이는 천상과 지하세계를 명백한 위계로 구분하고, 여신의 의미를 줄곧 모성과 이타성으로만 해석하는 인도-유럽 문명의 세계관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특징이다. 생명에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을 맺는 오늘날의 선형적 시간 개념과도 상이한 시간성이다.
책에 등장하는 2000여 가지 유물은 모두 고대 장례용품과 사원, 신전, 무덤에서 발굴된 조각, 인형, 프레스코화, 제사 용기, 토기 등이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 유럽과 중근동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의 물상과 이미지는 물결, 쐐기, 삼각형, 지그재그, V자, M자 문양과, 새, 뱀, 양, 곰 형상 등 총 28가지 형태로 분류되어 생명, 재생, 죽음과 재탄생, 에너지와 흐름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다시 대별되었다. 부록으로는 상징 용어 해설, 여신과 남신의 유형과 그 역할, 연대표, 유물 출토지 지도, 색인 등이 수록되어 있어 여신 언어의 문법을 다각도에서 풍부하게 익힐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의 성격을 ‘여신 종교 사전’으로 정의한 저자의 뜻에 걸맞게 일목요연하고 친절한 구성이 특징이다. 특히 개정판에서는 250*300mm의 커다란 초판 판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이 시기의 대표적 유물인 테라코타 토기의 질감과 색을 살린 장정과 표지 디자인으로 읽는 이가 책과 보다 공감각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을 읽는 팁으로 ‘직관’과 ‘영성’을 강조한 저자의 안내에 따라 《여신의 언어》가 지식의 습득을 넘어 내면에 잠재된 여신성과 만나는 체험을 이끌 것이다.
“이 책은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여신의 언어, 권력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포용과 치유를 꿈꾸는 여신의 언어를 찬란하게 복원함으로써 우리에게 ‘잃어버린 여신들의 파라다이스’가 이미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일깨워준다. 이 책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순간 당신은 위대한 여신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기 안의 잃어버린 아니마(무의식의 여성성)의 에너지가 깨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정여울 작가 추천사에서
전쟁과 기후 위기의 시대에서
이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
‘올드 유럽’엔 전쟁이 없었다는 김부타스의 주장은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인류사를 통틀어 지구상에 전쟁이 없던 날이 단 3일에 불과하다는 통계를 김부타스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지금도 일상적으로 전쟁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이야기가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기 사람들이 야금술을 익히고 난 후에도 치명적인 살상 무기를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 큰 규모의 마을에서조차 방어용 구조물을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 등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내용이다. 가축과 식량을 기르고 돌보는 행위가 중요했던 농경 사회에서는 평화와 평등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이라고 김부타스는 설명한다. 이러한 여신 중심의 평등 사회가 유목민족인 쿠르간족의 침략으로 무너진 뒤 ‘아버지 신’을 중심으로 하는 권위주의적 가부장제가 이식되고, 그 과정에서 여신들은 호전적인 남신들의 아내나 딸로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으며, 그나마도 그리스도교의 출현 이후에는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전쟁 없는 시기’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신화는 현실을 반영하